프롤로그-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과거의 시간 <누가, 언제, 어떻게>
그때는 누가, 언제, 어떻게 내 영혼을 흔들어 놓았는지가 몹시 중요했다. 좀처럼 성장하지 못해 여전히 무력한 과거의 나를 마주하면 참을 수 없어서 억울함을 까발리는 글을 썼다. 게워내듯 쓰는 동안 위로를 받았지만 모든 일엔 한계가 있었다. 사건을 나열하던 글쓰기는 결국 그래서? 에 걸리고 말았고 내게 일어났던 외롭거나 괴로운 일이 과연 누구와 상관이 있단 말인지 자문하게 했다.
과거의 시간 밑바닥엔 항상 고통과 분노, 우울이 가라앉았고, 이어지는 삶의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아팠다. 그때마다 내가 길어 올린 시간이 시시하고 형편없이 느껴졌다. 이처럼 해결되지 못한 상처는 사는 동안 같은 패턴을 무한 반복하다 언제나 나를 같은 상황에 데려다 놓았다.
해결되지 못한 결핍을 마음에 품은 채 양육자가 됐다면, 일은 좀 더 복잡해졌다. 무수히 많은 양가감정과 맞닥뜨려야 되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좋은 양육자가 될 수 있는가? 최소한 나쁜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거나 대물림만은 막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기 쉬웠다. 하지만 모두 불안한 마음이 지어낸 일일 뿐 실제로 통제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한 재생되던 과거의 시간에서 단숨에 나를 끄집어 올린 건 아들이었다. 고3인 아들이 얼마 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우울이라면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 병이었다. 하지만 그걸 아들이 앓고 있다면 문제가 달랐다. 나 역시 처음엔 확인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단 양육자로서 겪을 수 있을 만한 다양한 감정에 노출되며 무력감을 느꼈다. 모든 게 양육자인 내 잘못은 아닌지 집요하게 파고들며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양육자로써 느끼는 죄책감으론 어떤 상황도 변화시킬 수 없었다.
한동안 나는 이곳에 글을 쓰는 대신 관찰일지를 작성했다. 매일 아들과 나눴던 대화 내용, 아들과 나의 마음 상태를 소상히 적었다. 형식이 일지인 만큼 감정적인 표현보다는 최대한 객관적 사실 위주로 기술하고, 간단하게나마 그날의 대화가 남긴 것에 대한 소감을 적어 두는 식이었다.
얼마 전, 기록한 일지를 다시 읽던 중 나는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그것은 바로 일지에 적힌 기록이 가리킨 곳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바로 지금이란 사실이었다. 판단이나 집착이 배제된 관찰 일지에는 아들은 물론 나 자신의 감정마저도 있는 그대로 관찰하듯 적혀있었다. 더 이상 과거의 사건을 캐는 누가, 언제, 어떻게 나를 흔들어 놓았는가가 아닌, 이제 왜(Why)라는 질문의 답을 준비하라 말하고 있었다.
사춘기 아들 이야기를 글로 쓰는 일은 여러 가지를 고민하게 했지만, 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과정을 통해 자유로워지기를 선택한다. 우리에게 되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란 없었고, 지금 이 순간을 선명히 바라보는 일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불어 해결 못한 상처를 가진 양육자의 고충이나 사춘기 청소년의 우울에 관한 주제가 개인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보편성을 가진 기록이 되길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