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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y 10. 2024

이제 다 기억났어!

기록 덕분이야

얘가 어떤 아이였더라?

아들은 우울증 진단뒤에 종합 심리검사를 더 받기로 했다. 좀 더 심층적인 검사를 위해 양육자인 나도 검사지 작성을 했다. 빼곡히 적힌 질문지 문항을 마주한 나는 막막했다. 마치, 몇 번  밖에 본 적 없는 아이를 떠올리는 것처럼 아이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내가 그렇거나 그렇지 못하다고 표시한 것은 과연 맞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이 곤란한 감정은 내게 객관적인 관찰자 시선을 경험하게 했는데, 거기엔 완벽한 타자로써의 아들이 있었다. 내가 O.X로 드러낸 표식 안엔 혹시, 내가 양육자란 이유로 아이를 재단해 판단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게 했다.


사각 플라스틱 상자에는 내가 3권의 책으로 만들어 둔 육아 일기를 비롯해 아들이 어린이집과 유치원 다닐 때 기록 된 수첩이 보관돼 있었다. 수첩에는 그 기간 동안 만난 아들의 여러 담임 선생님과 내가 매일 주고받던 그날들이 대부분 기록돼 있었다. 나는 아이의 성장 기록이라 할 몇 권의 생활 수첩을 꺼내 읽으며 어쩌면 의미 있는 단서를 찾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됐다.

그 기록들은 곧 방향키가 됐다. 나는 그것을 꼭 쥔 채 19년 전으로 시간을 돼 돌렸다. 이미 청년의 모습으로 성장한 아들도 순식간에 아기였던 시간으로 돌아갔다. 수첩엔 내가 기억한 것보다 훨씬 상세하게 어린 아들의 매일매일이 기록돼 있었다.


나는 집에서 있던 특별한 일이나 아이의 그날 컨디션 같은 세세한 일을 주로 적어 보냈고, 담임 선생님은 원에서 지내는 낮시간 동안 아들의 일상 속 특이사항을 적어 보내주었다.


아들이 어린이 집에서 유치원으로 올라가는 동안, 담임 선생님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수첩은 가정과 유치원을 오가며 꼼꼼히 기록되었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잊고 있던 어떤 날의 장면이나 그 당시 느꼈던 내밀한 감정까지 끄집어 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귀하고 감사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랬다. 수첩에 적혀있는 데로 아들은 단 한 번도 수다스러운 적 없던, 태생이 조용한 아이였다. 수첩 곳곳엔 조용히 있던 아이가 방언 터트리듯 했던 엉뚱한 말에 관한 에피소드가 자주 등장했다. 아! 맞다, 잠투정이 심한 아들 때문에 나는 아이를 업고 기대앉아 잠드는 날이 많았지. 그땐, 참 힘들었는데, 그걸 다 잊고 있었다.


그뿐인가? 낯가림도 심해서 어디를 가든 미리 상세한 설명은 필수였다. 우린 지금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고, 무얼 할 것인지에 관한 일종의 시물레이션을 한 것인데, 그것은 아이의 낯가림 뒤에 숨은 두려움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수첩에는 대부분 애틋한 감정이 섞인 기억이 담겼지만, 한편엔 애면글면 아들을 키운 내 시간의 고단함도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래, 아들은 원래 조용했고 더구나 최근 몇 년간 줄곧 사춘기를 지나고 있지 않았나!  아이 마음을 더 빨리 발견하지 못했다는 자책은 이제 그만두라고! 내게 외치고 싶어졌다. 아, 이 녀석 키우면서 나 무지 힘들었었네!  나는 마치 모르던 사실을 알아낸 것처럼 혼자 씩씩거렸다.


그것도 잠시뿐, 수첩이 여러 권의 감사한 기록인 동시에 아들이 그 많은 시간을 기관에서 지낸 기록이란 생각이 들자 다시 양육자의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쯤 되면 부모는 애초에 자식을 향한 미안한 감정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거나, 죄책감에 빠지는 것도 습관이라 해야 됐다.


결국, 아들의 결핍을 찾기 위한 과정을 통해 나는 언제나 최선에 머물렀던 나를 발견했다. 나는 이일에 대해 엄마니까 당연한 일이라 말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 스스로 자존감을 지킬 때, 아이의 자존도 지켜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은 수첩을 꺼내놓고 아들과 대화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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