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함구
오늘 너를 꼭 안고 가볍게 흔들어 주었더니 네가 그랬다
"엄마, 나를 너무 사랑해서 벌벌 떠는 거예요?
-2009년 아들의 육아 일기 중에서-
지난 주말에는 세 권의 육아일기를 아들에게 보여줬다. 진즉 육아일기의 존재 여부를 알았음에도 아들은 마치 그것을 처음 본 것처럼 기록을 살폈고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나는 이 관찰을 통해 잊고 있었거나 놓친 일에 대해 다시 돌아볼 기회를 얻고 싶다. 그 기회는 오늘의 발걸음이 될 것이고, 무엇보다 회피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됐거나 몰라서 생긴 실수까지 스스로 인지할 때, 양육자인 내 성장도 함께 이뤄진다고 믿는다.
육아 일기 곳곳에는 아들의 심한 잠투정만큼이나 낯가림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했다. 어쩌면 이것이 아들의 기질과 상당한 관련 있는 메시지였을 것 같다.
세 살 무렵이었다. 낯가림이 심했던 아들은 친척 어른이 예쁘다며 돈을 주기라도 하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돈 주지 마세요!"를 외치곤 울어버렸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 모습이 귀여워서 몇 번이나 더 다가와 돈을 내밀며 아이의 반응을 보고 싶어 했다. 어른들은 아이가 보낸 메시지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신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부모를 포함한 어른들이 도움을 주기는커녕 자신을 향해 웃기만 했으니 두렵고 당황스러운 경험였을 것이다. 아이 마음과 상관없이 이 일화는 아들이 자라는 동안에도 자주 친척들 사이에 회자되며 모두를 다시 웃게 했었다.
그런 아이의 행동이 단순한 낯가림이 아닌, 선택적 함구증과 주시 불안증상을 동반했단 것을 알게 된 건 최근이었다. 그때는 이런 증상이나 병명에 대해 전혀 접해 볼 수 없었지만, 요즘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적잖이 관찰되는 증상이었다. 주변에 혹시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한 아이가 있다면, 도대체 왜 그러냐고 다그치거나 무작정 다가가기전에 신중해야 될 것 같은 마음에 공유해 본다.
선택적 함구증은 언어발달에 문제가 없음에도 특정한 상황에서 말을 하지 않거나 남의 말에 반응을 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다. 이 증상은 주로 사회적 불안이나 공포증과 관련이 있으며, 아이들이 학교나 다른 환경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선택적 함구증은 단순한 수줍음 이상으로, 유아기를 지나는 동안 표현이 서툰 아이는 각자의 기질이나 환경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것이 잘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못할 때 아이에 따라 몹시 큰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주시불안:주시불안은 타인과 마주 보거나 응시당하는 것이 불안한 증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안전하고 중립적인 상태에 있어도 공포와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어릴 때의 경험 때문인지 아들은 유독 어른에 대해서만 함구증상이 두드러졌었다. 다행히 또래 관계에서는 오히려 친구가 많은 편이라 증상을 인지하기 더욱 어려웠다. 아이의 신호를 못 알아차린 것에 대한 뒤늦은 자책보다는 아이를 대한 어른의 태도에 아쉬움과 반성하는 마음이 더 컸다.
과거 양육 환경에서는 대부분 아이가 다 겪는 과정이다, 크면 괜찮다, 유난스럽게 키우지 말라는 인식에 갇히기 쉬웠다. 나 역시, 지인 모임 때마다 아이의 낯가림이 모임에 행여 피해를 줄까 불안해서 빨리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을 뿐, 아이 마음을 공감하지 못했다.
어떤 병적 증상 때문이 아니라도 아직 표현이 서툰 아이가 드러 낸 반응은 또 다른 언어가 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비슷한 과정을 겪지만, 기질과 성향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될 것 같다. 행여 아이가 이처럼 낯을 가리고 선뜻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아이가 심리적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조금 거리를 둔 채, 기다리겠다는 메시지 주기를 권하고 싶다.
자책이 아닌 관찰로 얻은 것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다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온다. 아프고 아쉬운 것 투성이인 삶의 생태를 더욱 깊게 받아들인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그 중요한 메시지가 아들에게도 전달되길 바라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