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하고 일관되게 전한 사랑
지난 이야기-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혼란을 겪는 시기인 사춘기들에겐 더욱 그랬다.
홈스쿨에서 중요한 건, home은 home일 뿐, school 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집을 학교라고 우긴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엄마는 엄마일 뿐 선생님이 될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됐다.
나는 앞서, 사춘기라는 성장통을 혹독히 겪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봤었다. 그저 지켜보기만 한 게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양육자로서 그 폭풍을 잠재울 방법을 찾느라 고심했었다.
아들 사춘기는 끝날 듯 끝나지 않았고, 옥신각신 하는 동안 중고등 과정 6년 중 5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그 기간이 길어진 사이 3년 터울인 막내까지 본격, 사춘기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이쯤 되면, 심심한 위로의 말 정도는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 어떤 힘든 상황도 그저 시련만 두고 가진 않았다. 아들과의 지난한 시간은, 내게 중요한 일의 우선순위를 돌아볼 시간을 준 셈이다. 그뿐 아니라 사춘기 아이를 바라보는 양육자의 시선에 대해서도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 됐다. 그 결과, 사춘기 막내의 홈스쿨 과정의 방향에도 여러 영향을 미쳤다.
양육자가 자녀의 사춘기 시기를 '양육자와 자녀', '어른과 아이'라는 식의 수직적 관계로 두고 대응한다면,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질 뿐 아니라 서로에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었다. 요즘 애들이란...' 식 냉소적 표현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아들이 부디 사춘기라는 혼란스러운 여정을 무사히 끝내길 간절히 바랐다. 자신의 건강한 정체성을 찾길 바란다며, 자기 자신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아이에게 가 닿지 못했다.
그럴수록 점점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빠질 것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양육자인 나는 과연 나를 잘 알고 있는가? 자문했을 때, 나는 어디서 잘못됐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를 때는 타인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나 역시 나를 알아가고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타인이 보였고,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안다는 말이 아직 어려웠을 사춘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 기다려 줄 여유도 생겼다.
양육자 보다도 덩치가 커진 사춘기라 해도, 여전히 예전과 같거나 더 많은 양의 사랑과 관심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양육자가 보여줄 것은, 진심 어린 사랑은 물론,
내가 너를 바르게 지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친 태도로 반항하던 사춘기조차도 양육자의 단호하고 일관된 태도에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