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가 병은 아니라고
‘너희는 학교생활에서 제일 걱정되는 일이 뭐야?‘
내 교실에 오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대답이 모두 한 가지여서 놀랐다. ‘친구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거나 따돌림을 당할까 봐 걱정된다’ 는 말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당장 친구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단짝 친구가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돌변할지 모를 관계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겠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상대평가 속 엄혹한 경쟁과 친구 관계조차 불안한 어린 존재들의 이 방어적 자세가 무척 안쓰러웠다.
나는 얼마 전 사춘기와 함께 뮤지컬 공연을 보러갔었다. 공연장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반갑게 다가와 아는 척하는 이가 있었다. 그녀 역시 내 딸과 비슷한 또래인 사춘기 딸과 함께였다. 그녀와 나는 오랜만에 우연히 만났지만, 서로의 딸을 바라보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말했다.
"흠, 사춘기!"
우린 암호처럼 '사춘기'를 외치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곁에 아이들이 있어 긴말을 나눌 순 없었지만, '사춘기!' 그 한마디에 여러 감정이 오갔다. 신체적 정신적 대변혁기를 지나는 아이 곁을 지키는 양육자도 서로 위로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우린 눈빛에 긴 대화를 담았다.
'아이의 변화가 복잡하고 당황스러운 건 말할 수 없지만, 무척 인내하며 지내고 있어!'
'그렇지?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니까 곧 지나가겠지. 설마 평생 사춘기로 사는 건 아닐 테니까.'
위로와 다짐, 더불어 정말 그런 날이 오는 게 맞느냐 재차 확인하는 마음까지 느낄 수 있었다. 흠, 사춘기! 한마디뿐이었는데 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사춘기, 중2,라고만 해도 그 안의 의미를 짐작케 하는 암호 같은 게 존재했다. 집에 사춘기나 중2가 있다고 하면, 드디어 그때가 왔군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상황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중2 병이란 말은 생각해 보니 무섭다. 중2 즈음에 보이는 행동을 병적으로 치부하며 조롱을 섞은 말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는 말이라 더욱 그렇다.
삶의 한 과정을 지나느라 혼란스러운 아이를 두고, 오히려 어른들은 키우기 힘들다는 암묵적 표현을 대놓고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 그래도 경쟁과 관계에 대한 불안,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겪는 아이에게 무척 야멸차고 무심한 어른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화분에 물을 주기 전에 손으로 화분을 들어보고 화분의 무게를 가늠한 뒤 물 줄 시기를 정한다. 지난번에 똑같이 물을 줬다 해도 어떤 화분은 여전히 묵직하지만, 어떤 화분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화분처럼 가벼웠다. 사춘기의 마음같다고 할까?
이 방법이 손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나는 몇 번이나 화분을 들어 보았다. 정확한 선이 정해지지 않은 것을 맞추기 위해선 잠시 숨을 고르듯 집중하며 마음을 모아야 한다.
화분을 들어 물이 필요한지를 손으로 가늠하듯 사춘기와도 마음을 모아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때, 행여라도 중2병이냐는 말 같은 건 절대 하지 말고, 우리도 모두 그런 시기가 있었다고, 언제나 곁에 있을 테니 염려 말라고 말해주는 어른의 말을 아이도 기다리는지 모른다.
<다음 편에는 사춘기가 전하는 ‘슬픈 어른의 말’ 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