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경쟁에 부쳐
홈스쿨을 시작하고 우린 바닷가 앞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곤 했다.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에 함께 산책하고 가끔 맛난 걸 먹으러 다녔다.
그때 우린, 시간이 온전히 우리 것이란 사실에 들떴었다. 주어진 시간을 원하는 만큼 쓰고, 그만큼 책임지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홈스쿨은 또 다른 일상의 시작일 뿐, 시즌 이벤트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린 곧 우리가 선택한 삶을 꾸려야 했다. 자칫, 학교도 가지 않는 아이를 더 의존적인 상태로 만들 수 있단 우려가 생겼다 의존은 아이에게만 해당한 게 아니었고, 양육자인 나 역시 아이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의존하거나 집착할 소지가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가정을 경계하며 조금 떨어져 거리를 두기로 했다.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만큼, 각자의 공간을 존중할 필요가 절실했다. 우선, 나는 우리의 대화 방식부터 바꾸기로 했다.
수시로 마주 앉아 나누던 ‘주제 있는 대화’를 메일로 주고받기로 했다. 내 외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 사춘기와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고려한 제안이었다. 아이도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동의했다.
아이는 읽고 들은 이야기에 자기 생각이나 질문을 덧붙인 감상문 종류의 글을 메일로 보냈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아이가 '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경쟁을 소개하며 그에 관한 소감을 보냈을 때, 흥미로웠던 것은 하필, 학교라는 공동체를 벗어난 아이가 보낸 화두가
‘경쟁’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라난 성장 배경부터 성향까지 정 반대라 할 만큼 다른 두 미술가는 서로의 작품 세계를 흠모하다 못해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뿐 아니라, 질투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질투는 성장의 동력이 됐고, 각자 위치에서 최고가 되도록 했다. 이런 두 예술가의 흥미로운 관계성은 질투의 최상위 결말이라 할 '선의의 경쟁'에 본보기라 할 만했다.
인간은 가까운 이가 잘되는 걸 기뻐하고 응원할 때조차 마음속으로 질투를 느끼고, 자극받는다. 그러니 질투란 어디까지나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지만, 문제는 이 감정이 부정적인 결과를 일으킬 때였다.
질투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집단 괴롭힘이나 학교 폭력의 가장 근본적이고 복합적 원인 중 하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청소년 사회에만 있지 않고, 성인 사회라 할 직장이나 크고 작은 모임 안에서도 빈번히 일어나 사회문제가 됐다.
이젠, 자녀를 둔 부모라면 아이의 성적보다도 교우관계, 공동체 안에서 내 아이가 갖는 위치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엄마, 서로를 끝까지 견제하고 질투한 두 사람의 삶은 과연 행복했을까?" 아이는 내게 묻는다.
그들이 아무리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대가라 해도,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한 삶이 온전히 행복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더구나 그 둘이 죽음을 앞 둔 순간까지, 다시 태어나 그림을 그린다면 그땐 상대방처럼 그리겠다, 했단 대목에선 인간적 연민마저 느껴졌으니까.
과연 우린 어떻게 해야 그 여정까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아이의 질문에 답 할 말을 찾기 위해 고민이 깊어졌다.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혼란을 겪는 사춘기들에게는 더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