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지난 여행에서 돌아 오는 날, 나는 한 할머니의 곁을 따라 걷고 있었다. 우체국에 들려 배낭 안에 담긴 짐을 집으로 부치고, 고모를 만난 날 전해 주지 못한 책을 우편으로 보냈다.
대형 병원 안에 위치한 우체국을 이용했기 때문에 나는 온통 아프고 슬픈 얼굴을 한 사람들 틈에서 벗어난 직후였다. 병원에서 나오는 길은 경사가 심했다. 그것은 마치 통제할 수 없이 기울어지는 인간 삶의 상징 같았다.
내 앞에는 보행 보조기에 의지한 할머니 한 분이 위태롭게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 곁을 따라 걸었다. 혹시 어르신이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빛의 속도로 그녀를 부축할 작정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넘어지지도 않았고, 나는 그저 곁을 따라 천천히 걸었을 뿐인데 말이다. 모두가 앞질러 가기 바쁜 도시에서 가끔은 느리게 걷는 이와 보폭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우린 위로를 전할 수 있었다.
헤픈 마음은 감정의 경계가 느슨한 탓에 상처받기 쉽다. 세상은 그런 마음을 실속 없고 약한 것이라거나, 감정을 빼고 효율적으로 생각하라며 충고했다. 그러나 냉큼 충고를 따를 수 있었다면 애초에 헤픈 마음도 아니었다.
그 마음은 자주 걸음을 멈춘 탓에 세상의 속도를 따르기엔 언제나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홀로 남겨진 이를 그냥 두지 못했다. 한때 나는 마음 준 일을 후회하고 그런 나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바로 나였다. 일부러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
이제 나는 내가 약하고 느린 사람임을 인정한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을 향한 연민을 멈추지 않는 사람 말이다.
이 연재는 마음이 헤프게 멈춘 순간들의 기록이다. 빠르게 지나치는 세상에서 멈추고 돌아보는 일은 자주 비효율적으로 여겨졌지만, 사실은 삶의 서사를 더 넓고, 더 깊게 만들어주는 힘이었다. 상처받고 흔들린 경험은 잘 듣고, 더 깊이 보게 했다.
나는 앞으로도 조금 느리고 조금 헤프게 살아보려 한다. 연민의 감정은 판단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삶을 상상하는 능력이라 믿는다. 또한, 내 안의 이야기가 글이 되는 순간도, 마음이 헤퍼질 데로 헤퍼진 그다음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