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픈 마음은 충동에 가까운 연민 반응이다. 눈앞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해 곧바로 손부터 뻗고 보는 것 말이다. 다만, 이런 인간적 행위 이면에는 아는 만큼만 판단하고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 마음은 때때로 위험을 동반하기도 했다.
헤픈 마음의 소유자가 일말의 방어력도 챙길 수 없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겨울철 길고양이와 마주칠 때 일 것이다.
재작년 이맘때, 1층 우리 집 앞에 터를 잡은 고양이 라떼를 결국 입양하게 된 것도, 마음 헤픈 인간에겐 피할 재간이 없는 사고나 다름없었다. 라떼는 나의 첫 고양이다. 그럼에도 내겐 그동안 헤픈 마음이 맺어준 여러 고양이와의 인연이 있었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에서 어미를 잃은 새끼 고양이를 구조한 적이 있다. 처음 초등학생 무리의 눈에 띈 녀석은 종일 아이들의 손을 옮겨 다니며, 먹지도 못하고 장난감처럼 시달렸다. 밤이 되어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에야 비로소 단지 한가운데에 버려졌고, 아직 젖도 떼지 못했을 녀석은 작은 몸을 떨며 애처롭게 울었다.
나는 녀석을 데려와 씻기고 먹여 따뜻한 곳에 재웠다. 하지만 키울 생각을 하진 못했다. 사실 그 당시 나는 고양이를 좋아할 뿐, 그저 내가 잘 알고 있는 개와 비슷한 동물 정도로 생각할 만큼, 고양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나는 서둘러 입양 공고를 올렸다. 마침내 연락이 닿아 멀리서 찾아온 여학생에게 녀석을 입양 보냈다. 그녀는 만화를 그리는 학생이었고, 그 인연은 오래 이어졌다. 그녀는 종종 고양이를 케이지에 넣고, 경기도 이천에서 인천 우리 집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놀러 오곤 했다. 이제 고양이 집사가 되어 다시 돌이켜 봐도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오히려 궁금할 지경이다.
이렇듯 헤픈 마음이 만든 인연은 따뜻했지만, 그 마음이 늘 그렇기만 한 건 아니었다.
또 한 번은, 살던 아파트 단지에서 흔히 말하는 '개냥이'라 불릴만한 녀석을 만났을 때다. 나는 녀석에게 '앵초'라는 이름까지 붙여주며 밥을 챙겼다. 친화력 좋던 앵초는 다행히 주민들의 관심을 받으며, 자신의 영역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1단지였고, 나는 3단지에 사는 학생의 논술 개인 지도를 맡고 있었다. 하루는 3단지에서 수업을 마치고 밤길을 걸어오는데, 주차된 대형 화물트럭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앵초가 보였다.
"어? 앵초야, 너 왜 여기까지 왔어?"
나는 동네 아는 친구라도 만난 듯 녀석에게 말을 걸며 다가갔다. 평소 나를 보면 강아지처럼 달려오던 녀석인데, 어디가 아픈 건지 앵초는 나를 보고도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있었다.
"앵초야, 어디가 아픈 거야? 너 다쳤어?"
이미 나의 헤픈 마음엔 부릉부릉 시동이 걸렸다. 먼 곳까지 와서 아픈 앵초를 그대로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어깨에 맨 가방을 크로스로 고쳐 메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앵초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지만, 별다른 저항도 없이 화물차 밖으로 끌려 나왔다.
고양이의 돌발 행동을 방지하려면 목덜미를 잡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평소 앵초라면 그럴 필요까지 없었다. 나는 앵초의 양쪽 겨드랑이를 두 손으로 잡고 집까지 걸었다. 3단지에서 1단지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녀석을 들고 걷자니 겨울인데도 등에 땀이 났다. 내게 붙들려 오는 동안 앵초는 불편한지 가끔, 우웅~~ 하는 긴 울음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나는 "불편하지? 좀만 참아. 이제 다 왔어!"라며 녀석을 달랬다.
"앵초야, 어쩌다 거기까지 간 거야? 배고프지? 금방 밥 줄게. 다신 그렇게 멀리 가면 안 돼?"
나는 주절주절 앵초에게 잔소리를 하며 간신히 1단지에 도착했다. 이제 우리 집 앞에 앵초를 내려줄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맞은편에서 앵초가 나를 보고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여기 앵초가 있다면 내가 화물트럭 아래까지 기어들어가 끌고 나온 이 녀석은 누구란 말인가? 게다가 나는 녀석을 20분 넘게 들고 오지 않았나. 순간, 등을 적시던 땀이 식으며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다시 보니 녀석은 앵초보다 덩치가 꽤 컸다. 겁에 질린 나는 조심히 녀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녀석은 꾸웩, 괴성을 지르더니 빠르게 클린 하우스 방향으로 가 몸을 숨겼다.
그랬다. 녀석은 앵초와 무척이나 닮은 코트를 입은 3단지 길고양이였다. 끝내 의문인 점은, 난 착각을 한 거지만 녀석은 어째서 내 손에 잡혀 오도록 저항 한 번을 못 한 건지, 나는 녀석에게 꼭 묻고 싶었다.
상대에 대한 이해 없이 아는 만큼만 판단해 실행에 옮긴 헤픈 마음은, ‘무모함'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아무리 헤픈 마음을 가졌다 한들, 어떻게 화물트럭 밑까지 기어 들어가 생면부지의 길고양이를 끌고 나올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결국, 고양이의 생태적 특성조차 모르던 나의 헤픈 마음은 영역 동물인 녀석을 트럭 밑에서 끌어내 강제로 영역을 이탈시킨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선의라 믿던 내 행동은 녀석에겐 폭력이 돼버린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길고양이를 보면 참기 어려운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그때의 무모함이 떠오르면, 헤픈 내 마음의 진위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진짜 마음을 준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를 기쁘게 하기에 앞서 그에게 해선 안 될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그때야 비로소 헤픈 마음이 책임을 가진 사랑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요즘 나의 방어력을 상실하게 한 이 녀석은 길에서 생애 첫겨울을 맞고있다. 하지만 하루 한번 새벽 시간에 밥을 챙겨주는 일 말곤 해줄 일이 없어서, 마음 헤픈 인간은 몹시 힘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