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 사람
어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대충 알아보려면, 그가 어떤 일에 즐거워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일에 슬퍼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그 자체로 볼 때 사소한 일에 슬퍼할수록 더욱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사람이라야 사소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불행한 상태에 빠지면 그런 사소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쇼펜하우어, 『행복론』
오늘 아침 이 문장을 읽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는 꽤 자주 슬퍼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었다. 이 말대로라면 나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사람인 걸까.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대충 묶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마치 새벽 출근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매일 이 시간엔 약속이 있다. 창밖에서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비까지 섞인 매서운 바람에 마음이 급해졌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녀석이 며칠 전 내가 만들어 둔 겨울 집 안에서 작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시 서 있었다.
“집에 있었어? 잘했네, 잘했어.”
나는 녀석의 겨울 집 안에 사료를 넣어주고, 핫팩 주머니에서 밤새 식은 핫팩을 새것으로 바꿨다. 넓은 아파트 단지 한 구석에 놓인 작은 상자 하나가 녀석의 겨울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마저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에서 고양이 먹이 주는 문제는 늘 갈등의 중심에 있다. 누군가는 고양이를 불편해했지만, 누군가는 외면할 수 없다. 서로의 입장이 다를 뿐, 누구도 틀렸다고 할 수 없기에 이 문제는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는 사이, 계절은 겨울로 내 달렸다.
지난여름 태어난 녀석은 길에서 첫겨울을 맞았다. 유난히 바람이 사나운 날이면 울음소리는 더 애처로워졌다. 그럴 때는 먹이를 줘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덜컥 집으로 데려올 수도 없고, 당장 해줄 게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우리 삶 곳곳에는 이렇게 각자의 약한 구석이 타자의 모습을 통해 불쑥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사정대로 드러나는, 보이고 싶지 않은 헤픈 마음까지 들키고 말았다.
나는 길고양이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란 사실 앞에서 쉽게 흔들린다. 그 뒤엔 내 모습이 겹쳐 보이거나 과거의 내가 서 있곤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고양이를 돕고 싶던 마음 이면에는, 그를 통해 나 자신을 들여다 보는, 자기 연민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삶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우리에게 딱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내 편이 돼 줄 딱 한 사람 말이다. 헤픈 마음은 바로 그 한 사람이 돼주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결국 녀석에게 그 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고, 녀석이 겨울을 지낼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양이 밥 하나 놓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 과연 겨울 집 두는 일이 가능할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날은 계속 추워질 테고, 누군가는 대안을 준비해야 했다. 녀석이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자동차 엔진룸에 라도 숨어들면 큰 일이었다.
기왕 만드는 거라면 튼튼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단프라 상자 안에 스티로폼 상자로 방을 만들어 넣고, 출입문을 냈다. 핫팩 주머니 둘 자리와 사료 그릇을 놓을 공간까지 마련하니 제법 아늑한 투룸의 겨울 집이 완성됐다. 마음 같아서는 밝고 환한 집을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겨울 집 앞에는 안내문을 코팅해 붙였다. 운영 기간은 2월 말까지, 잘 관리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내 연락처도 적었다. 그리고 나는 새벽마다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사료는 녀석이 다 먹은 걸 확인한 뒤, 남은 사료 하나 없이 정리해 둔다. 그래야 그곳이 비난의 중심이 아닌, 녀석의 조용한 은신처로 남을 수 있다. 결국 내가 약속을 잘 이행하는 것이 녀석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새벽에 녀석을 챙기고 돌아오는 길, 나는 이미 하루치 헤픈 마음을 다 써버린 기분이 된다. 녀석은 집이 마음에 드는지 요즘은 종일 그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녀석이 바람 피할 곳 없이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한다. 하지만 그 마음이 오롯이 녀석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연민에 빠진 내가 내 마음을 견디기 위해 선택한 일인지를 더 이상 구분하고 싶지 않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사소한 일에 자주 흔들리며, 자주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다.
사람들은 자기 연민을 흔히 나약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자기 연민은 단순히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감정이 아니라, 나를 끝끝내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에 가깝다. 내가 먼저 내 사정을 가엾이 여길 수 있을 때, 타인의 사정 앞에서도 마음이 멈추지 않을 수 있을 테니.
오늘도 나는 첫새벽부터 녀석을 만나고, 아주 헤플 대로 헤퍼진 마음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 하루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아침 나는, 그동안 나의 헤픈 선택들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결국 나 하나뿐이라 해도, 나는 오늘도 그 말을 믿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