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덜 좋은 사람

선의의 기원

by 은수
덜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어떤 변화는 비로소 나로 돌아왔다. 선의를 나누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고, 배려에는 숨이 붙어 있어야 한다. 마음을 오래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함부로 흘려보내지 않는 기술도 필요했다. 결국, 좋은 사람이란 타인이 정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건네준 깊은 수락에서 비롯됐다.

나는 서울 토박이로 신도시에 살았다. 제주도 작은 바닷가 마을에 정착한 건 10년 전이었다. 도시에서의 삶은 늘 분주했고, 그때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천상 도시인으로 살아온 사람이 그러듯, 나도 시골로 내려와 한적하게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아이들을 작은 학교에 보내고, 매일 집에서 맞아주는 엄마가 될 상상은 얼핏 완벽했다. 하지만 시골마을은 도시에서 상상하던 그 여유나 한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익명성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고, 작은 공동체일수록 구성원 참여가 필수란 사실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도시처럼 문 걸어 잠그고 사는 삶은, 마을 왕따가 되기로 작정한 게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아이들이 있다면 더 많은 일에 자연스레 얽히게 돼 있었다.


바닷가 마을에는 그 흔한 배달은 물론, 작은 편의 시설조차 부족했다. 그 덕에 집밥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에 가까웠다. 다행히 그런 환경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요리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호의는 대부분 음식으로 표현 됐다. 이사하는 이웃에겐 겉절이를 담가 밑반찬과 함께 들려 보냈고, 누가 아프다고 하면 죽을 끓였다. 아예 이웃의 생일상을 내가 직접 차려 주인공을 초대하기도 했다.

그때, 내 선의는 진심이 분명했고, 주는 기쁨 외에 별다른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그러나 이런 내 마음을 돌아볼 기회는 뜻밖에도 코로나 시기에 찾아왔다. 자연히 음식 나누는 일을 멈추게 됨과 동시에 헤픈 마음을 정비할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나의 선의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그동안 생각지 못한 내 호의를 처음으로 의심해 보았다. 돌아보니 그 마음의 끝에는 언제나 내가 받고 싶었던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혼자 아파서 쩔쩔매던 기억, 힘든 육아에 달려와 줄 친정의 부재, 같은 경험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웃을 만나면, 그냥 봐 넘길 수 없게 했다. 결국, 남에게 건넨 선의 속에는 내 결핍이 숨어 있던 셈이다.

음식을 나누고 마음을 보태는 일은 늘 따뜻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내 마음의 허기를 덮기 위한 또 다른 마음이 들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거기엔 상대에 대해 내가 배려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기억도 남아 있었다.

타인과 마음을 주고받을 땐, 그 마음과 내 마음 사이의 보폭을 맞출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내 헤픈 마음은 언제나 상대보다 더 빨리, 더 멀리 걷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내 선의가 상대를 부담스럽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내가 멈춘 과정도 문제였다. 코로나라는 외부 조건. 그리고 6년 만에 바닷가 마을을 떠나 시내로 이사하게 된 것. 이 같은 타율적 멈춤 탓에 챙기던 기념일들은 하나도 잊히지 않았고, 주고 싶은 마음을 참는 건 더 어려운 일이 됐다.

'그럼, 이제 나는 예전보다 덜 좋은 사람이 된 걸까?'

적절한 경계는 따뜻함을 지속하는데 도움이 됐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선의는 절대 호의로만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나는 예전보다 더 솔직했고, 건강해졌다.. 나는 마침내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어야 될 것 같던 집착에서 벗어났고, 더 이상 나를 소모한 선의가 타인을 도왔다고 착각하지 않게 됐다. 이로써 때론 멈춤도 선의의 한 방식이 됐고, 내가 나를 지키는 만큼 선의는 왜곡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예전보다 덜 좋은 사람이 된 게 아니라, 더 진실한 사람이 돼 가는 중이라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새벽 6시. 나는 길 고양이 밥을 주고 돌아오다가 주차장에서 라이트가 켜져 있는 자동차를 발견했다. 분명 어제 길냥이 저녁을 챙겨줄 때도 라이트가 켜있던 걸 본 기억이 났다. 순간, 헤픈 마음에 부릉부릉 시동이 걸렸고, 나는 망설임 없이 차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동차 라이트가 밤새 켜져 있다고. 마음으로 그의 무사한 출근길을 염려하면서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베란다 밖이 시끌시끌하다. 결국, 보험회사 출동 서비스 차가 들어와 방전된 차에 숨을 불어넣고 있는 게 보였다.

'어젯밤에 좀 더 유심히 챙겨 볼 걸.'

혼잣말하던 나는,

스스로에게 이제 그만! 을 외친 뒤 서둘러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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