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최소한의 선택

불안과 침묵사이

by 은수
세상의 악은 의도를 가진 소수가 아닌, 침묵하는 다수에 의해 유지 됐다.

정류장을 향해 달려오던 남자는 버스가 정차 함과 동시에 버스에 올랐다. 간발에 차이로 버스에 오른 남자는 씩씩 대며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다짜고짜 운전기사에게 욕하기 시작했다.


운전석 바로 뒤 좌석에 자리 잡은 남자는, 예전에 버스가 무정차를 한 바람에 버스를 못 탔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곤 대뜸 "그거 너지?" 하더니 기사 탓을 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몇 정거장을 가는 동안, 남자는 잠시도 쉬지 않고 기사에게 욕을 퍼부었다. 만석이던 버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선생님, 제가 아닙니다. 그만하세요. 왜 욕을 하십니까?”

운전기사님이 몇 번이나 정중히 말했지만, 그럴수록 남자는 더 목소리를 높였다. 급기야 들고 있던 우산으로 운전석을 툭툭 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뉴스에서 운전기사 폭행 사건 기사를 볼 때면, 내가 겪은 일처럼 마음이 안 좋았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비슷한 상황을 보게 되자,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될 일인지, 아니면 뭘 해야 될지.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승객들 역시 비슷한 입장이라 믿었다. '괜히 나섰다가 일만 더 커지면 어쩌나? 나서는 게 괜한 오지랖 일 수도 있다'는 생각말이다.

내가 그렇게 마음만 갈팡질팡하던 그때였다. 버스 안의 소란을 뚫고 드디어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운전기사가 어디서 말대꾸야. 승객이 말을 하면 죄송합니다 하고, 가만있을 것이지…”

놀랍게도 남자의 뒤 자리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남자 승객이었다. 그는 상황을 중재하긴커녕 오히려 남자를 두둔하며 운전기사 공격에 힘을 보탰다.


잘 참고 있던 기사님도 한계에 이른 게 분명했다. 급기야 정류장에 도착하고도 뒷 문 여는 걸 한차례 놓치더니, 버스의 출발과 정지 상태가 불안정해졌다. 버스는 급하게 섰다, 출발하길 반복했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기사님이 손을 떨고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이제 남자 둘은 주거니 받거니 기사님을 향해 막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들 그만하세요! 운전하는 분한테. 이러다 사고라도 나면, 책임지실 겁니까?”

버스 안을 쩌렁쩌렁 울린 또 다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뭔가 결심 한 뒤 행동에 옮긴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가 두 남자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30대 후반이었고, 나조차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제 어쩌지?' 뒷 일을 생각해 뒀을 리 없었다.


의외의 반격에 운전기사를 공격하던 두 남자는 슬슬 눈을 피하더니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전형적으로 약자에게만 강하게 구는 이들이 분명했다. 버스 안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아까와는 사뭇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나를 결국 행동에 옮기게 한 건, 남자 편을 들고 나선 또 다른 승객 때문이었다. 나를 포함해 모두 가만히 있을 때만 해도, 그들과 나는 다를 바 없었다. 그저 모두 이 불편한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 바랄 것이고,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착각일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주변 눈치만 보는 동안 나도 방관자였고, 침묵은 때로 가해자를 도왔다.


마침내 버스 안이 조용해지자, 기사님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잠시 뒤 기사님은 백미러로 내쪽을 보더니 말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죄송하고 고맙다 말하는 기사님을 보는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날,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내 얘기를 들은 친구는 깜짝 놀라더니, 그 남자들이 그쯤에서 물러나길 다행이었다고 했다. 그리곤 다시는 그런 일에 나서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은 침묵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었다. 비록, 그 시작이 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방어적 행위였고, 다분히 위험을 내포한 일이었다 해도 나는 내 행동에 후회는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그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내 행동을 정의감이라고 해도 좋을까? 사실, 그 순간의 나는 옳고 그름을 가릴 정신도 없었다. 오히려 예측불가한 상황에서 사고가 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더 컸다. 하지만, 못 본 척 그 자리를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해 내 행동은 타인을 도왔다기보다, 방관자가 되는 나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정의감과 불안은 종종 닮은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또한, 헤픈 마음도 약하고 다정한 모습으로만 드러나지 않았다.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 개입하고, 상황을 멈추게 할 강력한 힘으로 나타났다. 다만, 그 힘이 언제나 옳았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통해, 침묵은 안전하게 보일 뿐, 결국 가장 무거운 선택이란 사실을 깨닫게 됐다.


헤픈 마음도 때론 강력한 힘으로 표출된다. 다만, 그 힘이란 선하게 보일 의도가 아닌, 더 이상 방관자로 살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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