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 해지를 해지하는.
제주시 OOO 씨 (남 59세)를 찾습니다.
175 cm75 kg. 베이지 색 패딩, 검정바지, 흰 운동화, 마스크, 야구모자-112 신고 바람
요즘 우리는 스팸 문자를 포함해 원하든 원치 않든 각종 안내 문자를 받는다.
나 역시, 인근 지역 교통사고나 화재사고로 인한 교통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송받는 일이 종종 있다. 다른 문자와 달리 돌발적 상황을 알리는 메시지에는 실제 다급한 마음까지 담긴 것 같다.
나는 특히, 실종자를 찾는 문자를 받을 때, 한동안 메시지에 마음이 머문다. 구체적으로 명시된 실종자의 용모와 차림새를 떠올렸다. 건장한 50대인 그가 어쩌다 실종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까?
간혹, 연세 높은 어르신의 실종 메시지에 적힌 '치매'란 단어를 보면 무방비한 그들의 행적을 마음으로 따랐다. 또 지난번, 늦은 밤 초등학생 2명의 실종 메시지를 받았을 땐, 물가에서 아이들을 놓친 부모 마음으로 무사 귀가를 빌었다.
아이들이 그저 노느라 정신이 팔려, 미처 집에 연락을 못한 일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무사히 아이들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너무 야단치지 말고,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고 말해 주는 부모이기를 바랐다.
실제, 실종자 경보 문자 제도가 시행된 후, 실종 치매 노인, 지적 장애인, 18세 미만 아동 청소년을 발견하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특히 실종자를 찾는 시간이 시행 전 평균 34시간에서 시행 후 시민들의 제보로 평균 4시간 36분으로, 7.4 배 단축됐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실종자를 찾는 골든 타임이 1시간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 효과는 굉장했다.
하지만, 걱정하며 주위를 살피는 마음 헤픈 인간의 염려와 달리, 실종자를 찾았다는 문자는 받아본 기억이 없다.
실종자를 못 찾아서 메시지가 안 오는 거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고, 찾았지만 안 보낸 거라면 좀 무심한 행정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마음 헤픈 사람들이 실종자를 찾은 줄도 모르고 내내 주변을 살피는 중이면 어쩌려고.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실종자 문자 서비스 시스템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었다. 좀 더 자세한 구조를 알고 싶었다. 우선, 실종자를 찾았다는 귀가 안내 문자는 의무 사항이 아니었다. 단, 경찰청 사이트에 접속해 실종자 귀가 여부를 확인할 수는 있었다. 안타깝게도 기억나는 몇 명 실종자 사건이 아직 유보된 채 남아있었다.
경찰성 사이트엔 cctv에 찍힌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길래, 지금껏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걸까.
자료를 찾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더 있었다. '실종자 문자 서비스'를 검색하자 제일 먼저 뜬 것은 '실종 문자 알람 안 받는 방법'이었다. 댓글 창에는 설정을 해지할 방법을 상세히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상관없는 문자가 자주 와서 시끄럽고 불편하다.' 솔직히 관심 없다.'였다. 나도 그 말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삶은 저마다 버겁고 우리는 당사자가 되기 전에는 깨닫지 못하는 게 많은 존재였으니까. 오히려 그 글을 보고 나니, 찾았다는 문자를 보내지 않는 데 이런 사유도 포함되겠구나 이해가 됐다.
무엇이든 선택할 자유가 있는 우리는, 타인에게 닥친 불행도 설정하거나 해제할 수 있다. 어쩌면 실종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할 테니까. 그러나 사고는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왔다.
어느 날 그게 내가 됐을 때, 작은 단서 하나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오히려 문자 알림이 왔을 때, 내 주변의 소중한 이들을 한 번 더 돌아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나는 삶이 깊어질수록 우리가 결코 무관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믿게 된다.
지난번 서울 여행길에 나는 흥인지문의 횡단보도 앞에서 어떤 문장을 떠올려 이곳에 글을 쓴 적이 있다. 제주에선 볼 수 없이 넓고 긴 횡단보도 앞에서 막막했던 감상을 적은 것이었다.
도시는 여전했다. 건너야 할 횡단보도는 아득히 멀었고, 그 길을 무사히 건넌 뒤엔 언제나 새로 목숨을 얻은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경적 소리와 잦은 정체, 다급한 엠블런스 소리는 내가 살아있음은 물론, 기약 없이 떠났던 도시로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음주 운전 사고 뉴스를 보게 됐다.내가 문장을 떠올렸던 바로 그 자리였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이럴 때 나는 종종 삶의 어느 만큼은 덤으로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 무사히 지난 자리에서 누군가는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날 나는 실종 문자와 다를 바 없는 자리에 서 있던 것이다.
그걸 모두 운으로 치부해도 좋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선이 존재들 사이를 부단히 이었다 풀어주는 삶의 모습을 떠올리면, 과연 누구를 남이라 규정지어 나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사고 뉴스를 보며 나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살아남은 쪽의 사람이 되는지 생각할 수 있었다.
헤픈 마음은 외면하지 않는 것에서 왔다. 어쩌면 설정을 해지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실종자 경보 문자는 실종자가 갈 만한 가장 근처 지역에 전송된다. 우리는 늘 어디서 발이 빠질지 알 수없고, 누구든 닥친 일 앞에선 말했다. '내게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고' 말이다.
우린 서로에게 최소한 설정을 해지하지 않을 만큼의 관심이 필요하다. 마음이 걍팍한 존재로 살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이젠 너무 외롭지 않기 위해, 안내 문자의 설정은 모두 ON에 두면 좋겠다.
헤픈 마음은 세상을 구하는 마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심을 끄지 않고, 켜 둔 채 살아가겠다는 태도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