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의 거리
타인의 삶은 그림 속 풍경처럼 소비되기 쉽다.
예전에 살던 1층집 부엌 창으로는 공원 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것은 하나의 액자 속 풍경화 같았다. 계절마다 풍경을 바꿔 그려 넣은 그림 액자 말이다.
언제부턴가 풍경 속에는 은빛 공단 저고리에 연한 분홍빛 한복 바지를 곱게 차려입은 할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미처 발견 못한 그림의 일부처럼 말이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와 늘 같은 자리에 앉아 한동안 머물렀다. 멀리서 봐도 한복 입은 폼이 근사한 어르신의 모습은 한가한 일상을 보내는 노년의 모습으로 손색없었다. ‘아버지도 이젠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을까?' 그 모습은 나로하여금 오래전 헤어진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어르신은 악천후만 아니면 언제나 내가 보는 그림 속에 있었고, 마침내 내겐 익숙한 풍경이 됐다.
어느 날, 집 근처 마트에 갔을 때였다. 항상 그림 속 풍경처럼 바라보던 할아버지를 바로 앞에서 보게 됐다. 나는 마치 오래 알던 사람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우린 초면이 분명했고, 그마저도 그는 나를 보지도 못했다. 어르신은 바로 내 앞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노란 호박단추가 달린 공단 한복을 입고 있었지만, 멀리서 보던 것과 사뭇 달랐다. 은빛 공단 저고리와 연한 분홍빛 한복 바지는 세탁한 지가 오래된 듯 여기저기 얼룩이 선명했다. 누렇게 오염된 한복 동정과 그가 계산대 위에 올려둔 빵과 우유가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우린 타인에 대해 얼마나 많은 착각과 오해를 하며 사는가? 내가 멀리서 본 어르신은 공단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볕을 쬐며 공원을 산책하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그의 모습은 그와 정 반대였다. 누군가의 돌봄과 관심이 필요한 힘없는 노인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치 나는 잘 지낼 거라고 믿던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을 마주한 것 같았다. 결국, 마음의 거리감은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제대로 보지 않는데서 오는 게 분명했다.
타인과의 거리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는 좁힐 수 없었다. 대충 보거나 떨어져서 보고 내 멋대로 추측하는 건 오해만 불러왔다. 그들은 관심을 기울이고 좀 더 가까이 보려 할 때에야 비로소 보였다.
어르신이 먼저 떠나고, 뒤이어 물건 계산을 하던 나는, 마트 점원에게 물었다.
"저분 여기 자주 오셔요?"
"아, 매일 오셔요. 항상 저 빵이랑 우유, 저것만 사가셔요."
돌아오는 길에 보니, 어르신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 곁에 놓인 빵 한 봉지와우유가 그림 속에서 놓친 어떤 상징처럼 눈에 들어왔다.
다음날, 나는 고슬게 밥을 짓고 김밥 재료를 손질해 단정한 김밥 도시락 하나를 준비했다. 아직 온기가 남은 도시락을 들고, 나는 어르신이 있는 벤치로 향했다. 내가 도시락을 내밀자, 어르신은 눈이 동그래져 손사례를 쳤다. 하지만 내게서 어떤 진심을 봤는지, 어르신은 도시락을 받아 들곤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다.
우리의 관심을 기다리는 이들은 생각 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되돌아오는 길, 헤픈 마음은 마침내 알아차렸다는 기쁨으로 넘실댔다.
헤픈 마음은 세상 모든 고통에 닿으려는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가까이 있는 타인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것은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며, 오해 없이 타인의 어려움을 알아차리려는 긴 여정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