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비효율적 인간

결국, 헤픈 마음-에필로그

by 은수
헤픈 마음이란, 효율을 신봉하는 시대에서 끝내 인간다움을 간직하겠다는 가장 비효율적인 선택이다.
나의 부모가 말하길
울지도 보채지도 않아 키우기가 참 효율적이었다던
갓난아이는, 자라서 자라서 비효율적인 인간이 되었다.
ctrl+e/v 보다는 직접 옮겨 적는 것이 낫다는 그는.
귀갓길 지옥철 속에서 지쳐버린 다리로, 버스 환승 대신 굳이 걷는 쪽을 택하는 그는.
멀쩡한 휴대폰 갤러리는 건드리지도 않고, 굳이 종이 달력에 일정 정리를 하는 그는.
그런 그는
심지어 글씨를 적는 다면 모음 마지막 획을 쓸 때 길게 늘여 쓰는 편이라, 낭비한 잉크가 남들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효율적이려 애쓰지 않는다. 그는 효율적이지 않다. 그는 비효율적이려 애쓴다.

디지털 범벅이 된 세상에서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손으로 쓴 편지가 제격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 많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비효율은 기꺼이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는, 그리하여 마음 쓰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한 그런 연습, 그런 노력.

그러나 살다가 길을 잘못 들어 애먼 길을 돌아서 가야 하거나, 코앞에서 버스를 놓쳐 소중한 시간을 맨땅에 버려야 하거나, 작업하던 업무 파일이 갑자기 날아가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해야 하거나.
때로는 사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질 정도로 내 삶의 모습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오늘보다 내일 더 성실히 마음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하고 그렇게 떠올릴 수 있길.

-김준형 책상만화-<비효율적 인간>

'헤픈 마음' 연재를 읽은 막내가 선물처럼 보내준 글이다.

나는 마음이 헤픈 인간으로 사는 동안 뭔가 떳떳하지 못한 감정을 자주 느꼈다.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형태로 드러나는 내 헤픈 마음은 예상치 못한 오해를 사거나 때론 의도를 의심받기도 했다. 가까운 주변인조차 그마음을 실속 없는 헛똑똑이 짓이라고 했으니까.

나조차도 그런 나를 당당히 인정하지 못하는 동안, 숱하게 쌓인 헤픈 내 이야기가 눈길 위 발자국처럼 내 뒤를 따라왔음을 알게 됐다. 그때, 나는 어쩌면 그 헤픈 마음이 나의 정체성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나는 비효율적 인간으로 살아왔다. 나는 누구에게나 그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필요한 용기, 자기 확신 같은 장애물을 완전히 뛰어넘지 못할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비효율은 실패가 아닌, 한 존재가 계산을 멈추는 순간이었다. 결과보다 과정에 마음을 내주겠다는 명확한 자기 정체성의 선택말이다. 결국, 헤픈 마음이란, 비효율을 감수하겠다는 존재의 선언이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 날이었다. 막내가 우산 없이 학원에 간 뒤였다. 조금 내리는 비가 아니어서 당연히 우산을 사서 쓰고 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는 우산 없이 비를 맞은 채 돌아왔다.

"비가 많이 왔는데, 우산을 사지 그랬어?"

"그게요. 우산을 사긴 했는데, 노점에서 비 맞고 나물 파시는 할머니께 씌어 드리고 왔어요."

말하곤 막내는 내 표정을 살폈다. 아마도 새 우산을 주고 온 일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헤픈 마음 DNA도 따로 있나? ' 혼자 웃음이 났다.

"그랬어? 잘했네."

평소 내게 이런 상황은 당연하고 익숙한 전개였다. 하지만 아이가 우산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행동에 옮긴 일은 또 달랐다. 우선, 그 마음은 가르친다고 생기는 게 아니었고, 무엇보다 나는 아이의 용기와 성장을 분명하게 칭찬해 주고 싶었다


내가 막내와 비슷한 나이였던 어느 겨울밤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칼바람이 부는 대로변에 앉아있던 백발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그때 그는 반팔 차림으로 추위에 질린 듯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있던 얼마 안 되는 돈을 몽땅 꺼내 쥐어드렸다. 할아버지가 뜨거운 국물로 끼니를 해결하길 바란 것이다. 그러고도 나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엉엉 울면서 집에 도착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내 행동에 대해 좋은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 구걸하려고 일부러 그러고 있는 거야. 너 같은 숙맥이 있어서 먹고사는 거야! 이 헛똑똑이야."


그 말은 눈물이 쏙 들어가게 충격적이었다. '세상은 선한 마음을 이용하는 곳'이란 메시지는 어린 내게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마저 남겼다. 그 뒤로 나는 마음을 헤프게 쓴 일을 내놓고 말하지 못했다.

실제로 누군가를 돕고도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왜 매번 그런 마음이 생기는지, 왜 친구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지 소외감마저 느꼈다. 그때 내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지만, 생각했던 말을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가여운건 가여운 거지. 오죽하면 그런 걸 속여서 돈을 구걸하겠어!'


<헤픈 마음> 연재는 그런 의미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었다. 더불어, 헤프다는 말에 담긴 부정적 뉘앙스가 미약하나마 재해석되길 바랐다.

그 여정에서 나는 난생처음 마음 헤픈 일을 두고 칭찬을 다 받았다. 막내가 보내준 글처럼, 비효율적인 존재로 살아온 삶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을 용기를 얻은 것이다.


나의 헤픈 마음이 또다시 타인으로부터 실속도 전략도 없는 마음으로 판단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오늘보다 내일 더 성실히 마음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하고 떠올릴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비효율적인 인간으로 살 것이다. 그 선택은 나를 여전히 느린 존재로 두겠지만, 나를 무감각하게 만들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김준형 책상만화

헤픈마음을 응원해주신 분들 덕분에 저는 또 한번 선명해질 기회를 얻었습니다. 15화로 헤픈 마음1을 마칩니다.

며칠 남지 않은 한해 마무리를 하고, 다시 뵐게요~^^ 무엇보다 1년 내내 소진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독서가 시급하네요.

헤픈 마음2도 잘 준비해 돌아올게요.

모두 건강하시고, 새해엔 좋은 일들 많으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헤픈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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