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아끼려 할 때 우리는 쉽게 단정하고 서둘러 등을 돌렸다. 헤픈 마음이란, 타인을 이해함으로 결국 나를 이해하려는 마음이다. 이미 끝난 관계나 상처로 남은 시간을 다시 들여다볼 그 힘은 지난 시간, 내가 보지 못했던 얼굴을 보여줬다. 이처럼 헤픈 마음은 내가 잃었다고 여겼던 것들 속에서 뜻밖의 빛을 찾아주었다.
그 무렵, 나는 아들의 독립 준비를 하며 사진첩 정리를 하고 있었다. 핸드폰 속에 담겨 있던 사진을 시기별로 정리해서 인화해 새 사진첩에 옮겨 담는 작업이었다. 가족의 사진첩을 각각 정리하다 보니 꽤 여러 날이 걸렸다.
그의 사진첩은 10년 전 아이들과 내가 제주도로 이사하던 짐 속에 있었다. 꽤 묵직하고 낡은 사진첩엔 그의 유년기부터 학창 시절과 사회 초년생 시절에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택배로 보내줄까?' 몇 번 생각만 했을 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박스에 보관 중이었다. 그와는 10년 전에 이혼했다. 택배를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혼 후 전처가 돌려보낸 물건이 자신의 성장 앨범이라면 그걸 받은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막내딸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빠에게 다녀오고 싶어 했다. 얼마 전 아빠가 몸을 좀 다쳤다는 소식을 접한 뒤였다. 그의 부상 소식에 놀라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걱정하는 아이를 위로했지만,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혼이 개인사에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이혼하기까지 부부에게는 지난한 과정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건 순전히 부부간 문제였고, 아이들 입장이 담긴 건 아니었다. '정상가족'이란 잣대로 보자면 우리는 이혼 과정을 통해 '비정상 가족'이 됐고,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 게 분명했다.
삶에는 많은 일이 정상과 비정상의 잣대로 분류됐다. 하지만 어차피 똑같은 존재가 있을 수 없는 마당에 같은 기준을 대입해 개인의 삶을 판단할 순 없다.
나는 죄책감 대신 아이들과 더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기준도 모호한 말에 휘둘리지 않고, 그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생각할 뿐이었다.
정상이니 비정상 같은 말은 사양하지만, 아이가 느낀 감정에는 진심으로 공감하고 싶었다. 나는 서둘러 제주에서 김포로 갈 딸의 비행기 표를 예약해 두고, 아이 편에 그의 사진첩을 보내기로 했다. 내친김에 아이들의 성장 앨범도 정리해 함께 보내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는, 헤픈 마음을 활짝 열어 그의 사진첩 정리에 본격 돌입했다.
수시로 핸드폰을 켜 찍어 둔 아이들 사진은 시기별로 최대한 압축했음에도 많았다. 어느 것 하나 뺄 사진이 없었다. 그만큼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많던 것이다.
'성장하는 동안 애들 예쁜 모습은 나 혼자 독차지했네.'
친권을 가진 주 양육자로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럴 때 가끔은 나 자신을 피해자처럼 여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는데 말이다.
사진 인화를 맡기고, 그의 무거운 옛날 사진첩을 가볍고 산뜻한 요즘 사진첩으로 바꿨다. 며칠 만에 인화된 사진이 도착했고, 드디어 나는 전남편의 사진첩 정리를 위한 대대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낡은 사진첩에 꽂혀 있던 사진을 순서 대로 빼서, 그걸 다시 새 사진첩에 옮겨 꽂으면 됐다. 하지만 우리를 과거의 시간으로 데려다 놓는 사진의 특성상 그 일은 애초에 단순 작업으론 끝낼 수 없었다. 더구나 이미 내 헤픈 마음엔 부릉부릉 시동이 걸린 상태였다.
헤픈 마음은 어느새 사진 속 주인공이 전 남편이란 사실도 잊은 채 사진 감상에 빠졌고, 작업은 무척 더디게 이어졌다. 그가 돌도 되기 전 찍은 흑백 사진에선 아들 모습이 보였다. 통통한 볼에 정면을 응시한 표정이 영락없이 아기 때 아들이었다. ’ 아들도 이것과 비슷한 사진이 있었는데? 어딨 더라?' 나는 다시 아들 사진첩을 뒤져 결국 꼭 닮은 사진을 찾아냈다.
두 사진을 나란히 붙여 놓자 엉뚱하게도 미소가 지어졌다. 머리숱이 유독 많은 그가 바가지 머리를 한 국민학생 때 사진을 보다가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어릴 때 사고로 아버지를 여읜 그의 사진첩에는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졸업식마다 엄마와 단둘이 찍었거나 큰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아버지의 부재가 더 크게 다가왔을 과거 그의 그날들이 마치 내가 겪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일찍부터 가장의 책임을 진 그가, 앳된 모습으로 일터에서 찍은 사진에 이르러서는 한 존재의 외롭고 고단한 성장 과정에 마음마저 숙연해졌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나를 실망케 했던 전 남편이 아니었고, 그저 나와 다른 하나의 선명한 존재였다. 사진 속 그는 어리고 약자인 소년이었고, 일찍 롤모델을 잃은 아들이자 책임감을 덮어쓴 채 실습을 나간 어린 청년이었다. 그 여정을 생각하니 내 마음에 남았던 미움과 원망들이 몹시 하찮은 것처럼 여겨졌다.
결혼 후 사진 속 남편은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고 감격스러운 듯 보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자주 했다. 아마도 자신이 아버지가 됐다는 감회와 갓난아이를 보여줄 아버지가 안 계신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무렵, 사진 속 그는 젊기도 하지만, 표정이 밝고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그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혼으로 가는 과정에서 느낀 여러 감정이 부정적인 렌즈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도 잘해 보고 싶었구나.'
이제와 있던 일이 없던 게 될 순 없지만, 지난 시간의 많은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내가 그의 사진을 통해 새삼 한 존재의 여정을 이해한 것처럼, 사진첩을 받은 그도 지난 삶의 여정을 통해 앞으로의 날을 건강히 걸어가길 바랐다. 이제라도 그에게 잊었던 시간을 돌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이가 떠나는 날,
나는 배낭 안에 두 권의 사진첩을 넣어주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젊은 날에도 보였더라면, 나는 좀 더 지혜롭게 살 수 있었을까? 자문하다 그만뒀다.
대신, 곧 과거가 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왜곡되지 않은 렌즈에 헤픈 마음의 빛을 모아 사진 찍듯 살아볼 것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