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지테 Apr 26. 2020

비로소 나는 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소신껏 살자 (feat.박새로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늘 내길을 내가 찾아서 개척해 간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나는 방황을 하고 있었다. 



약 3년간의 방황 


23살까진 그래도 꽤 난 내 눈에만 보이는 내 길이 있었고 그 길의 끝은 알 수 없으나 이 길이 맞는 길이라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다 방황을 시작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몸과 마음을 하얗게 불태우고 한국에 돌아와서부터였다. 


우선 당장에 생계와 벌이를 하기 위해서 일자리를 찾아봤다. 사실 이때부터 창업을 시도하려 했었다 어느 인터넷 기사인가 커뮤니티에서 본 한 프랑스 르 꼬르동 블루 졸업생이 한국에 와서 1인 소자본 창업으로 베이커리를 온라인 판매하면서 나라에서도 여러 지원받고 시작을 한 걸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한국 와서 바로 창업해야겠다고 스스로 과신을 하며 귀국의 길에 올랐다. 물론 귀국을 한 이유는 크게 그것만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름의 부푼 기대와 소신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 후에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소자본 창업과 무자본 창업에 관한 책을 8권 산일이다. 약 일주일간 미친 듯이 그 8권의 책을 읽고 나는 뭔가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책들은 어떤 사례의 일부분들을 담아냈을 뿐 길 잡기는 크게 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 르 꼬르동 블루 출신의 졸업생과 같은 루트를 밞으려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우선 제조업을 하려면 제조시설이 있는 허가된 공간이 있어야 하며 그걸 위해서는 매달 임대료를 내면서 각종 시설들과 다양한 것을 갖추고서야 비로소 시작이 가능하고 무자본, 소자본으로는 뛰어난 수완이 있지 않는 이상 그냥 초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창업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며 취업의 길에 올랐다.


동대문에 있는 이태리 음식을 하는 키즈카페에서 3개월을 일하면서 한성대입구에 서울 자취방을 구해 친구 2명과 함께 3명이서 살았다. 이때 키즈카페를 다니면서 일 끝나고 와서 블로그를 꾸준히 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블로그로 돈을 낼 수 있는 건 바이 건을 시작하면서 블로그가 점점 커지고 퇴사 직전에 한 달 약 100 이상을 벌 수 있었다. 나는 그 후로 퇴사를 하고 블로그에 집중하여 약 5개월간 블로그로 디지털노마드가 되어 생활을 했었는데 한성대입구에서 살 때 돈 좀 생기니 자취하는 친구들과 매일 배달음식 시켜먹고 하다 보니 살도 엄청 찌고 생활도 엉망이 었는데 그래서 그 집을 정리하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려 집을 알아보다 신대방 쪽으로 두 번째 자취방을 구했다. 이때가 가장 인생의 황금기이면서 동시에 가장 암흑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블로그가 나락으로 가기 전 한 달 최고 800가까지 벌어서 돈 버는 게 우습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암호화폐에도 겁 없이 막 투자하고 돈을 미친 듯이 하염없이 쉽게 쉽게 썼었다. 돈이 있으니 밥은 늘 배달로 때우고 원래 히키코모리 같은 성격인지라 방구석에 박혀서 게임과 블로그와 애니메이션을 보며 폐인과 같은 생활을 했었다. 지금의 생활을 만들기까지 방황을 심하게 한 이유도 이때 쉽게 큰돈을 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후로 2017년 12월 잊을 수 없는 그때 블로그와 암호화폐가 동시에 무너진 최악의 시기였다. 처음에는 블로그도 돈 벌고 암호화폐도 투자금이 하루 지나면 수십 퍼센트씩 오르고 말도 안 되는 나낧이었다. 그러다 2018년 1월에 모든 게 무너지고 그 후에 돈줄도 없고 뭐라도 해야겠고 모은 돈은 암호화폐 투자로 몽땅 말아먹어서 생계유지를 하려면 무엇이든 해야 했으나 그동안 해왔던 요리는 더 이상 하고 싶지가 않았다. 다시 일본으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겠다 싶었기도 하고 요리를 하려면 국내보다 해외에서 해야겠다 싶어서 두 가지 길을 선택했는데 그 당시 일본 지상직 모집을 하는 국비지원 프로그램이 있었다 지금은 더 많은 업체들이 생겼는데 그 한 곳에 지원했고 또 다른 것은 호주 쪽 워킹홀리데이로 요리사 취업을 노리는 것이었다 이것 또한 국비지원 프로그램이 있는데 전부 '월드잡'이란 곳에서 찾아서 시작했고 지상직이 먼저였기에 이 서류를 넣은 시기가 4월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 5월에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한 후에 7월부터 10월까지 약 3개월 정도 발산역 부근의 이 국비 지원하는 업체에 다니면서 일본 공항지상직에 도전하게 된다.



두 번째 일본 취업도전

    


이 지상직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1주일 뒤쯤에 바로 면접을 보게 됐는데 간사이공항에서 핸들링하는 가장 큰 규모의 파견회사에서 일본 담당자가 와서 면접을 봤는데 만약 이 프로그램에 합격하지 않고 호주로 갔다면 인생이 또 크게 바뀌었을 거 같지만 운명은 이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면접을 보고 8월 둘째 주쯤인가 발표를 했고 면접 본 사람들 중 과반수가 합격을 하여 가장 많은 인원이 간사이공항으로 취업을 나가게 되었다. 여기서 이미 화근이 될 일이 생기는데 보통 지상직 근무로 가게 되면 체크인 카운터 쪽으로 일하게 되는데 나는 램프라는 포지션을 하게 되었다. 사실 잘 감도 안 오고 어떤 일인지 알 수도 없었지만 늘 일을 저지르고 보는 성격인지라 램프직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얘기가 나왔을 때 무조건 할 수 있다고 괜찮다고 했다.  한국에서 램프직을 배울 때 비행기가 정차된 구역에서 비행기를 유도하거나 체크인 카운터와 기내 상황을 중간에서 조율하고 컨트롤하는 역할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일을 하니 다양하게 일을 하게 되었다. 10월 중순경에 간사이공항으로 출근을 시작했는데 기숙사 배정을 받고 또 유니폼도 받고 약 2주간 지상직 수습생으로 수습을 받고 마지막에 시험도 봐야 했는데 전부 영어 시험이었고 이때 동기들 중에 유일하게 탈락하여 두 번의 시험을 봐야 했다 일을 하기 전부터 상당히 삐그덕거렸는데 램프 일을 시작할 때도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우선 한국에서 그리고 수습 때 배운 램프 일과 막상 현장에서 일하게 되는 내용이 많은 부분 달랐다. 또한 중간에 또 다른 파견회사에 나를 포함해 남자 동기 2명 해서 3명이 파견에 파견인 이상한 형식으로 한 달간 막노동 같은 캐리어 옮기고 실는 그런 단순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우리는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본사에 따지러 갔고 나는 이때쯤 이미 회사와 외국인 노동자로써의 우리의 현실을 깨닫고 이 일 또한 내일이 아니다 싶었다. 차라리 주방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퇴사 직전에 계속 일본에서 다시 워킹홓리데이때와 같은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는 요리 쪽 취업을 계속 찾았는데 끄끝내 찾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위에서 왼쪽부터 공항지상직, 공항 램프직 ,대기업단체급식조리사, 공기업조리사 유니폼도 참 많이 다양하게도 입었다.

계속된 방황


일본 취업을 두 번이나 실패하고 돈과 시간을 낭비만 한채 손에 남는 것은 없고 고생만 하면서 나는 계속 소모돼 졌다. 한국에 다시 와서는 꽤 열심히 취업을 알아본 거 같다. 공항일은 약 3개월 정도 하고 귀국했는데 서두른 이유는 한국에서 상반기 취업이 시작되기 전에 오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들어가 진짜 실력을 키우고 제대로 요리를 해보려 했었는데 그런 곳은 의외로 실력자들이나 경력 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많이 했다 면접관도 유명한 스타 셰프 중 한 분이 봤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메시지로 일할 생각 있냐고 왔었지만 처음에는 불합격했기에 다시 가지는 않았다. 그 후에 단체급식 쪽으로 유명한 대기업 중 한 곳에 들어갔는데 들어가는 과정도 참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서류통과 후 실기 면접도 보고 인성검사도 하고 임원면접도 보고 그 후에 어디 리조트에 가서 2박 3일간 연수도 받았다. 그 후에 각 지역으로 근무처를 발령받았는데 나는 경기도 오산 쪽 산속에 있는 연수원에 배정을 받았다 이때부터 조짐이 안 좋았는데, 조리사가 나와 실장 두 명뿐인 데다 처음에는 제대로 된 기숙사도 없이 지냈다. 식사인원은 200 ~300 언저리로 단체급식에서는 적은 편이지만 둘이서 하기에는 힘이 든 데다가 실장은 오전 나는 오후로 시간대가 나뉘어 더더욱 힘들었다. 제대로 된 연수도 없이 바로 실전 투입이었기에 왜 취사병 출신들을 선호한지는 알겠더라 그렇게 여기도 아니다 싶어 2달도 안돼서 나왔다. 


역시 요리는 아닌가 싶었지만 이때 한성대 쪽에서 자취할 때 같이 살던 친구 한 명이 좋은 조건의 직장을 알려줘서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이 강남에 있는 공기업이었다. 대기업 단체급식보다 들어가는 게 쉬웠는데 거기는 파견회사로 일하던 사람들이 운 좋게 공기업 전환이 되면서 조금 질 안 좋은 사람도 끼어있는 썩은 곳이었다. 첫 만남에서 야야 거리는 곳은 처음이었기에 이 부분은 부정할 수가 없다. 이곳은 1달 조금 더 하고 나왔다. 격이 떨어져서 도저히 다닐 수가 없었다. 



갑자기 마케터???


공기업을 나와 다시는 진짜 다시는 주방에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고 뭘 하지 하다가 다시 블로그 쪽으로 생각이 움직였고 마케팅을 배워서 마케터로 가보자라고 생각이 들어서 알아보던 중 또 국비지원 프로그램이 있어서 지원하게 되었다. 현재도 모집 중이긴 한데 다양한 국비지원 프로그램을 받다 보니 별 실이 없는 곳들이 참 많은 거 같더라 아무튼 2019년 여름은 이 온라인 마케터 양성과정 프로그램으로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에 PPT 팀 과제 발표를 하면서 약 2달 정도 고생을 했는데 문제는 취업이 안됬다는 것이다. 취업은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업체들을 소개해주고 1차 2차 3차까지 취업기회를 준다 그 덕에 취업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나는 하도 많은 직장을 들어갔다 나왔다 해서 이것이 너무나 마이너스인 데다가 아무래도 마케팅은 전공 안 따진다고 하지만 요리 쪽이랑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나 보다. 나름 블로거로 꽤 잘 나갔던 이력도 있고 해서 자신도 있었는데 쉽지가 않았다. 그러면서 작년 한 해는 정말 몇 번의 직장을 왔다 갔다 하고 이리저리 헤매고 나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었고 심지어 생계 해결도 안 돼서 어머니께 손을 빌리기도 하고 구제불능의 삶이었다. 그러다 운명의 작년 12월이 찾아온다.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인생 무쌍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덧없이 보내던 나날이 지속되자 부모님은 서울에서 올라오라고 하시고 나도 더 이상 비싼 월세를 감당하기도 힘들었다. 나름 알바 자리도 계속 알아보고 했지만 취업보다 알바 자리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이때도 마음만 먹으면 주방 쪽 일자리는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서울대입구에서 자리 잡았던 3번째 자취방도 정리를 하고 동두천으로 돌아갔다. 20살 이후 부모님과 떨어져 나마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독립을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지만 결국 뭐 하나 이룬 것 없이 돌아갔다. 참으로 허무하고 허망한 한 때였다. 나는 이때 또다시 요리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아 국내에서는 못하겠으니 일본으로 요리 취업하려고 모든 방법을 찾아서 업체에 의뢰도 맡기고 다양한 정보도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같이 자취했던 친구 한 명이 같이 동업해서 창업하는 게 어떠냐라는 제안도 하고 어머니도 그때 차라리 돈을 빌려줄 테니 니 가게를 열어봐라 해서 이쪽으로 생각이 조금 기울었다. 


지금이야 잘한 것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상가 계약을 할 때만 해도 나는 자신도 크게 마음도 없었다. 작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상가 자리를 알아보러 매물을 뒤지고 다녔고 부동산도 여러 군데 나녀봤다. 괜찮은 매물이 있을 때는 직접 가서 유돟인구가 어떤지 계속 관찰도 하고 나름 상권분석도 하면서 다양하게 찾아봤다. 그러다 계약한 곳은 바로 지금의 '치킨 말싸미'가 있는 곳인데 처음 모습은 너무나도 허름한 데다가 원래 요식업을 하던 자리도 아니고 교통편도 좋지 않은 별로인 상가였다. 다만 가격이 저렴하고 평수도 가격 대비 넒고 지하 창고도 있어서 잘 활용하면 괜찮은 곳이었다 다만 여전히 단점이 더 큰 그런 곳이었다. 


우린 여러 군데 상가를 더 보고 나서 원했던 곳이 우리보다 먼저 계약이 되는 것을 두 번 경험 후 이 상가마저 누군가 계약해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같이 동업한 친구는 조급함을 느끼고 더 찾아봐도 다른 곳은 없는 거 같으니 계약하자고 해서 계약을 해버렸다. 그것도 내 이름으로! 이때부터 불길함을 계속 느꼈는데 상가 계약 후 약 한 달 반 정도 가게 공사기간을 주셔서 나름 여유롭게 진행을 하였는데 결국 그 기간도 넘어서 3월 초에나 오픈을 하게 되었다. 작년 12월 말에 시작한 공사가 2월 말이 돼서야 끝이 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가장 심한 건 동업자와의 다툼이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우린 맞지 않았다. 모든 의견이 다 다르고 생각도 달랐고 무엇보다 가고자 하는 방향도 달랐다. 


우여곡절 끝에 가게를 오픈하기는 했으나 3월 한 달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계속 스트레스를 주면서 하루하루 피 말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중에는 서로 싸움을 피하려고 말도 잘 안 하게 되었고 어색하고 싸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다 보니 손님들도 그것을 느끼고 재방문율도 낮아지고 매출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시작부터 매출이 크게 좋지는 않았는데  2주 정도는 계속 오르다가 그 후로 떨어지기만 하였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나는 도저히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고 마지막 방법으로 업종변경을 고려해보자 하였는데 결론적으로 친구는 같이 하기로 한 것이 초밥 전문점이고 내가 손 털고 나가면 혼자 하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가겠다고 하면 돈은 못주겠다 하고 내가 인수한다고 하면 자기 투자금은 달라고 했다. 솔직히 너무 괘씸했지만 나는 내 미래를 잃을 수는 없었고 더 잘할 자신도 있었기에 그렇게 오픈 한 달 만에 우리는 갈라섰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돌고 돌아 이제야 나답게 살고 있다


나는 본디 내가 옳다고 맞다고 생각한 것은 누가 나무라도 옳다고 믿고 행하며 아니다 그르친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은 누가 뭐래도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어느샌가 남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며 남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에 끌려다니고 제대로 나답게 살지 못했던 거 같다. 홀로 창업을 하겠다 생각한 지 약 한 달 정도 '치킨 말싸미'를 오픈한지는 2주 차인 지금 매일매일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 한계에 부딪히는 날이 많지만 늘 가슴 한편에 가지고 있던 내 가게를 차리는 꿈을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되었다. 내가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서 만든 내 레시피로 내 음식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보람되고 의미 있는 것인지 요리는 즐거운 것이란 걸 다시 깨닫게 되었다. 몇 년의 방황과 수많은 좌절과 수많은 역경을 딛고 지금도 완성형은 아니지만 완성에 가까워지려 노력 중이며 오늘도 맛있다, 고맙다, 잘 먹었다는 말을 듣기 위해 혼신을 쏟아 음식을 만든다. 


지금의 '치킨 말싸미'는 나의 삶 모든 걸 녹여낸 곳이고 그 언젠가 바랬던 덕업 일치의 삶을 가능케 한 공간이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꽤나 돌고 돌아왔지만 언젠가 바랬던 것들이 결국은 시간을 건너 현재는 그것을 이룬 형태가 되었다. 원하고 바라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가 보다. 그것이 더 간절하고 절실하다면 분명! 지금은 이 가게를 성공시켜서 내 생각이 옳았다고 증명하고 나아가 많은 이들의 희망이 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기에도 창업하여 해내는 사람이 있다고, 청년창업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리고 가장 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이 새로운 꿈과 목표는 현재 진행 중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하여 늘 강하려고자 한다.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나라는 갇혀진 세상을 부시고 나와야 한다 그것이 고통이라면 기꺼이 걸으리 나는 끄끝내 승리자가 될 것이고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될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물론 당신도!


현재 의정부 가능동에 위치한 '치킨 말싸미'라는 순살 닭 요리 전문점에서 오너 셰프를 맡고 있습니다. 저의 지난 몇 달간의 창업 고난기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청년 요식업 창업의 실상을 낱낱이 날것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보다 많은 '치킨 말싸미'의 소식을 알고 싶은 분들은 아래 블로그 주소를 들어가 주세요 :)

http://blog.naver.com/ghfjvb465

이전 14화 한달만에 업종변경 제정신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