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밤낮없이 그 작업에 매달리고 있으면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묘한 희열을 느꼈다.
선배, 또 딴생각했죠!
정신을 차려보니 앞자리에 앉은 지민의 얼굴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제가 무슨 이야기했는지 듣기나 했어요?"
지민의 이야기 한쪽으로 월요일에 있을 보고자료를 생각하던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키웠다.
"그럼! 들었지. 근데 그게 좀 그래. 전공도 안 한 애가 이제 와서 갑자기 심리학이라니... 잘은 모르지만 그쪽 분야로 가려면 석사 이상 계속 공부해야 하고 자격증도 필요할 텐데. 확실히 그건 아니지."
"선배는 뭘 그렇게 강력히 확신해요.
해보지도 않았는데요.
아직 우리가 모르는 영역도 있는 거잖아요."
"그걸 꼭 해봐야 아냐?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
그리고 하기 싫은 것도 좀 참고 해야지,
그렇게 의지가 부족해서 앞으로 뭘 할 수 있겠냐?"
순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준석은 거의 울 것 같은 지민의 눈과 마주쳤다.
"음... 뭐, 그렇게 그만두고 싶으면 차라리 법과목이 들어간 다른 시험은 어때? 노무사라던가, 법무사라던가... 이제껏 공부한 게 아깝잖아."
"역시, 오빤 제 일에 별 관심이 없나 봐요.
아니, 저에게 관심이 별로 없는 거겠죠.
이런 이야기 전에도 많이 했었지만저는 한 번도 오빠에게
상식적이고 현명한 판단을 해달라고 한 적 없어요.
오빠도 알잖아요. 저도 꽤 오래 노력해 봤어요. 밀어붙이고 억지로 하는 거에 지친다고요. 솔직히 이대로는 더 잘할 자신도 없고요. 더 하는 것도 무리예요.
늘 뭔가 강요받는 느낌에 시달려요. 조금만 해도 에너지가 소모되고요. 괜한 비교와 경쟁에 제가 사라지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심리학을 공부할 땐 달라요. 에너지를 쓰는 느낌이 안들어요. 오히려 충전되는 기분이에요. 쏟아붓지 않아도 능률이 오르고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재밌어요."
"글쎄. 내가 좋아하는 일, 가슴 뛰는 일 해봐서 아는데,
별로 남는 게 없더라고.
결국 현실적인 가능성을 생각해야지."
"저는요. '현실적'인 가능성 말고
'더 큰' 가능성에 저를 열어놓고 싶어요.
이번에 고시 공부하면서
여실히 느끼고 다짐했어요.
내일을 기다리며
오늘을 잃지 말자! 라구요.
언젠가만 바라며 사는 삶이야말로 인생의 낭비예요.
알 수 없는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려 하는 건 어리석어요.
이상적인 모습으로 삶을 개선하고 싶다며
머릿속만 가득 채워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제가 매일 같이 그러고 있더라고요.
보기 좋은 무리한 계획을 세우며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어요.
예전의 선배처럼 도피처로 이상을 좇는게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을 충분히 인정하고, 보내줄 거 보내주고
포기할 거 포기하며 내린 결정이에요."
준석은 불쑥 튀어나온 과거 지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인 사이라 그런지 회사에선 잘 되던 표정관리도 안 된다.
지민을 보니
실망과 함께 서운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
"선배 말을 들으니 더 압박을 받는 것 같아답답하네요.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저를 봐주는 게 아니라
오빠의 잣대로 이렇게 저렇게 기준을 세워놓고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 같아 기분 나빠요.
...
저 먼저 갈게요."
솔직한 성격 그대로,
할 말 다하고 나가버리는 지민.
혼자 남은 준석은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다.
'하... 피곤하다.'
'역시 여자친구는 만드는 게 아니었어!'
'내 주제에 무슨...'
준석은 혼자 터덜터덜 카페를 나왔다.
한 마디로 '더러운' 기분의 밑바닥에
관계의 끊어짐이란 공포가 움틀거렸다.
'에이, 돈이나 벌어야지!'
요즘 준석은 부업과 주식에도 관심이 많다.
월요일에 있을 회의도 떠올랐다.
습관처럼 미래로 생각을 옮기며
준석의 걸음이 빨라진다.
버스에서 내려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계획대로라면 지민과 함께 공원에 있을 시간이다.
문득 일요일 오후 한적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봄이 왔네'
대학시절 연극 연습을 하다가
학관 뒷산에 올랐을 때처럼
복잡한 마음과 서두르던 시간이
지금에 멈춰졌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린다.
선명하게 아름답다.
자세히 보니 보인다.
가만히 봐야 보인다.
자세히 가만히 보니 나뭇잎사이
나뭇잎과 닮은 새가 앉아있다.
하늘이 무슨 색인지, 구름은 어떤 모양인지
내 앞에 앉은 저 사람의 지금 마음은 어떤지
깊이 볼 수 없었다.
지금 여기에 나는 없었으니까.
누구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든
머릿속으로는 늘 내 안의 걱정과 계획을
반복재생하고 있었으니까.
매번 다닌 길이지만
처음 보는 새집이다.
여기에 누가 저런 새집을 지어놨을까?
새에게 집을 선물할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굴까?
알아주는 이 없고, 상을 주는 이 없어도
연고 없는 새를 위해
기꺼이 마음을 쓰고 시간을 내는 여유가 부럽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선배에게 만족이 있어요?
그럼 대체 언제 만족할 거예요?"
지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준석은
돈을 더 잘 벌고 싶었다.
가난한 자신이 싫었다.
사랑하는 지민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더 좋은 걸 사주고 싶었다.
그런 준석에게
지민이 바란 것은
늘 돈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준석과 함께 밥을 먹고
대화하는 것만으로
지민은 웃었고 행복해했다.
돈을 많이 벌면,
성공을 하면...
똑같은 레퍼토리는
늘 준석 혼자만의 계획이었다.
욕심을 부릴수록
시간에 인색해지는 준석에게
지민은 늘 서운해했고,
그만큼 둘은 덜 행복했다.
다음 날
업무에 집중이 안된다.
지민은 단단히 삐졌는지 그렇게 가고 아무 소식이 없다.
준석은 선뜻 먼저 연락할 자신이 없다.
'하, 오늘 할 일도 많은데... 역시 여자친구는 도움이 안 돼. 그냥 선후배로 지낼 걸, 이러다가 아예 못 보는 사이가 될지도 모르지. 어제는 내가 심했나? 아냐, 오래전부터 쌓인 거 같던데... 내가 괜히 관계를 망친 건가?... 아, 진짜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까톡]
지민이다!
꼬리를 문 생각 뭉치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잔뜩 눌려있던 준석의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선배! 저 취업했어요.ㅋ
지금 통화 가능?]
이건 무슨 소린가?
[ㅇㅇ 잠시만]
흘러나오는 미소가 티 나지 않게
준석은 핸드폰을 벌떡 들고 일어서,
옥상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도 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선배!]
반가운 지민의 목소리.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잘 갔을 리가 있나? 그건 그렇고 취업이라니, 무슨 소리야?]
[헤헤, 잠은 잘 잔 거예요? 아침은 챙겨 먹고 나왔어요? 사실 어제 선배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는데 연락하고 싶어도 참고 있었어요.]
그녀는 늘 그렇다.
자신의 안부보다
나의 안부를 먼저 묻는다.
[저 오빠에겐 말 안 했지만, 심리상담소에 지원했었거든요. 나름 규모도 크고 이쪽에선 알아주는 곳이에요.]
[정말? 전공자도 아니고 상담 경험도 없는데 뽑아줬다고?]
[네, 실은 저 꽤 오래전부터 공부하는 내용과 생각들을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거든요. 정보도 모으고 생각도 정리할 겸. 근데 그 내용을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뭐, 아직 정식 직원은 아니고요. 인턴 같은 거예요. 그래도 뿌듯해요. 잘하면 경력을 쌓으며 계속 일할 수 있을 거라고 했으니 잘해봐야죠.]
[대단하네. 진짜 지민이 네 말처럼 '알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해 마음을 열어야 하는 건가? 하하.]
[그렇다니까요!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원하는 일이니까, 힘들이지 않아도 바로 되잖아요.]
"어이~
아침엔 죽상이더니 기분 좋아 보이네~"
어깨를 툭 쳐서 돌아보니
성철 과장이 흘낏 지나치며 묻는다.
"여자친구?"
"네. 고시공부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상담소에 취업했다네요."
"오 그래? 능력자네."
"좀 신기하긴 해요. 심리학에 푹 빠져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이렇게 되네요."
"그거야 말로 능력이지."
"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내가 우리 와이프에게 늘 하는 이야기야.
뭐든 하려 들고
붙들고 확인하고 고정시키려 하고
집중해서 대들고 싶은 그 충동 좀 누르라고.
그것만 내려놓으면 훨씬 나을 거라고.
행동을 더 하지 못한 것보다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이
원하는 것에서 더 멀어지게 하는 거야."
"앗! 사모님이 아니라 저한테 하시는 말씀 같은데요?"
"하하, 응 준석이 너 가만 보면 우리 와이프랑 스타일이 비슷한 거 같아.
흐흐 너 내가 왜 이렇게 담배를 피우는지 알아?
이게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멍 때리면서 아무 생각 안 할 때
그 빈틈으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거거든.
팀장이 스트레스 주고 막 말도 안 되는 일이 쏟아질 때
그냥 두면 별의별 생각과 걱정이 와서 덮치잖아.
그럴 땐 일단 여기 올라와서 멈추는 거지.
매달려서 반드시 다 알려고 하지도 않고
다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고
가능성과 빈틈을 허락해야
새로운 뭔가가 들어올 여지도 생기더라고."
준석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맞아요. 제가 항상 생각이 많거든요.
어제는 우연히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는데
안 보이던 새집이 보이고 새소리도 잘 들리더라고요.
그러고 나니 제가 여자친구에게 실수한 게 뭔지도 알 것 같았어요."
"그렇지. 누구나 멈추는 게 필요해.
멈춰야만 보이는 게 정말 있다니까?"
시간을 잘 쓰고 싶었다.
효율적으로 성과를 만드는 사람들이
멋져 보였다.
하루를 48처럼 쓰는 방법들을 찾아보고
시간관리 비법을 공부하고...
시간은 늘 아쉬웠다.
부족하니 '조금만 더'라며 졸졸 따라다녔다.
분명 종일토록 앉아 있었는데,
"많이 했어?"
하고 누가 물어보면
"그냥, 하긴 했는데..."
아쉬워서 대답은 늘 이런 식.
그런데 참 이상하지?
휴가는 하루도 빠짐없이 알차게,
돈을 더 벌 기회가 있어도 과감하게 포기.
자신이 정한 확실한 우선순위인 가족에게 시간을 쏟는 성철 과장에게서는 단 한 번도 시간이 부족하단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