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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Mar 12. 2024

싫은 소리도 들어야지! 진실에 눈 돌리지 않기

#10. 성철과 인영

01.

성철


쓰고 나면 원상 복구 좀 하라는 건데,

바로바로 정리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언제나 마무리는 내 차지지.


그러고 보면 애들한테 신경도 안 쓰고, 자기 일하는 거 반만이라도 가정에 애정을 좀 쏟아보지.


"반찬이 이게 뭐야?"


대충 하나 고르면 되지 이 여자는 마트에서 음료 하나 고르는데도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거지?

아이고, 밉다.


"다 샀어? 더 봐야 해?"


흠, 티가 났나 보군.

눈치를 보는 것 같네.

말도 별로 안 하고,


냉랭한 분위기가 나도 싫지만...


잘못은 잘못이고,

고칠 건 고쳐야지.


아, 오늘따라 왜 이리 밉냐!



02.

인영



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 게 아니야



숨이 쉬어지지 않던 그날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면서

인영은 생각했다.


툭하면 지적하고 싫은 티 내고

자기뜻대로 나를 바꾸려는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그래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거라는데,


당신은 애들 엄마로서 보살펴 줄 사람,

같이 살면서 똑 부러지게 내조할

아내가 필요했던 거지


날 사랑한 게 아냐


다들 그렇게 참으며 맞추며 살아간다는데

그렇다면 삶은 너무 고통이 아닌가?


갑자기 온 세상 여인들이 슬픔이 몰려오는 듯했다.


인영은 거울 속 훌쩍거리는 얼굴에 대고

고생한다.. 애쓴다.. 수고한다.. 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여자들을 위로했다.


눈물을 멈추려 들어간 화장실에서

인영의 눈물은 작정한 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얼굴이 무섭기까지 해서,

서둘러 지우려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며 알았다.


나도 마찬가지구나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사랑하기가 참 힘들구나...


순간의 진실을 마주한 순간

밉지는 않았다.

밉지는 않지만 슬펐다.


용서와 연민까지는 하겠지만,

사랑하기 힘들단 사실이.


돌아서면 또 살아가겠지.

그래도 훨씬 낫네.

예전만큼 감정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한 발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다만 인영은 사랑하기 힘든 자신이 측은했다.


그러다가... 점점

나만큼이나 사랑하기 힘들었을

남편도 측은하고


또 그러다가...

서서히 마음이 확장되면서 조금씩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측은한 자신을 포함하여

또 한 명의 측은한 인간 박성철마저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사랑한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존재로서 사랑이라고 하니까.


그렇다니까,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서운하고 억울해서

당신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다.


03.

성철과 인영


인영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철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간신히 아문 상처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마음공부니 뭐니 무슨 도인 된 사람처럼 그러더니... 것 봐, 이론으론 아무리 빠삭해도 속으론 또 화가 나지?"


"당신은 정말.. 그렇게 밖에 말을 못 해? 응, 화 나. 지금 엄청 기분 나빠. 예전처럼 또 폭발할 것 같으니까, 잠시만이라도 날 좀 내버려 둬."


이럴 때면 철은 더 화가 났다. 아내는 늘 이런 식이다. 항상 '자기만 착한 사람 나는 나쁜 사람'을 만든 채 일방적으로 상황을 종료하고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맨날 나만 답답하지. 나만.'


불편함을 질질 끌기 싫다. 잘잘못을 따져서 앞으로는 이런 일로 싸우지 않도록 만들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철은 자리를 피하는 아내를 붙잡으려 자신도 모르게 모진 말을 퍼붓는다.


"태연하게 혼자서 마음 다스리면 끝이야? 난 당신 얼굴도 보기 싫은데, 어쨌든 대화를 해야 풀 거 아냐?"


좀 전까지 똑같은 생각을 했건만,

'보기 싫다'는 에 인영의 목소리가 떨린다.


"있잖아. 여보. 나 참는 거야. 당신은 얼굴 보기 싫은 정도겠지만, 난 당신이란 인간이랑 살기가 싫거든!

이런 사람이랑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어.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다른 사람이랑 결혼을 해서...


암튼 지금 대화하면 더 안 좋은 소리만 나올 것 같으니까 그만해. 내 입에서 나올 말을 나도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까."


철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진다.


"또 그 이야기야? 살기 싫다는 얘기?"


"극단적인 표현이 나와서 미안한데,

응 지금 내 심정이 그래..


아무렇지 않게 비난하고 상처 주는 행동,

못마땅해하는 태도가 견디기 힘들다고!

나는 온옴으로 저항하는 거야.

이 만큼 괴롭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그럼 당신이 잘했다는 거야? 솔직히 내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 불 끄란 소리를 몇 번이나 했어. 얘들 과자 먹으면 바로바로 좀 치우고... 내가 틀린 소리 했나?


그렇게 말해도 습관이 안 되는 보면

당신은 필요성을 못 느끼던지,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거야."


"와, 당신은 진짜...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다고 하는데도 계속하네. 너무한 거 아냐? 이해심이 그렇게도 없어? 당신이 극도로 깔끔하고 정확하단 생각은 못해봤어? 당신같이 까다로운 사람은 어떤 룸메이트라도 버티지 못할걸?"


"당신 눈엔 사소해 보여도 나는 그게 힘들다고. 뒷정리는 내가 다 하는데 당신은 고칠 생각이 없잖아. 유별나게 까다롭다느니 이해심이 없다느니 인신공격까지 할 거 없고, 난 다른 사람에겐 관심 없어.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당신과 나 사이의 문제야."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 당신 성격 맞춰주는 거 너무 힘든데,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당신이야말로 언제까지 그런 생각을 할 거야. 못살겠다느니. 난 결혼에 어울리지 않다느니, 이럴 땐 남편도 아이도 없이 자유롭고 싶다느니... 그런 생각을 더 해서 뭐 할 거냐고.


지난번에 충분히 이야기하고 합의보지 않았어? 그저 꿈에 불과한 생각들은 아무 소용도 없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니 감정적으로 내뱉는 소리들은 그만두겠다고. 최후 옵션은 없는 셈 친다고. 안 그랬냐고?"


수긍이 되지만 인정하기 싫다.


인영은 거의 소리치듯 쏟아붓는 상철의 말을 그냥 두고 이상 듣기 싫다는 듯 끝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어깨를 감쌌다.

한동안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었다.


이전 같으면 미움에 부글부글 속이 탔거나

피해자가 된 억울함에 원망을 쏟아부었을 텐데....

웬일인지 정말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싸우며 자신도 몰랐던 서로의 바닥까지 보았다. 미운 정 고운 정 싸우면서 쌓인 내공으로 이제는 싸움의 기술마저 터득한 건지, 인영은 끝까지 고수하던 나만 피해자란 시나리오를 조금은 내려놓고 싶어졌다.


그래, 경험상 늘 그랬다.


진실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지만,

감정을 부풀려 방어하거나 공격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솔직한 편이 훨씬 낫다.


울고 불고 서운할지언정

덮거나 쌓지 말고

용기 내어 대화를 해봐야 한다.


때마침 상철이 빼꼼히 문을 연다.


"좀 나아졌어?"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다.

인영의 괜한 자존심도 꼬리를 내린다.



부부는 차 한잔씩을 들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종종 틀어놓는 힐링 영상이

옆에 앉은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졌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영상 속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인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보, 난 말이야. 가장 편해야 할 당신이 불편한 게 싫어. 눈치 보기 싫어.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


자유롭고 편안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눈물이 고이는 걸 보니, 가슴이 이걸 원했나 보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해졌다.


"당연히 남편인 내가 제일 편해야지. 눈치 보지 마!

당신은 내가 뭐라고 하는 게 그렇게 싫어?"


"솔직히 어려운 사람이고 지적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 근데 생각해 보면, 당신이 말한 거에 비해 내 해석이 과장된 것 같긴 해.


계속 상처를 받아서 그런지 여보가 하는 작은 말, 작은 행동 하나에도 강한 저항감이 생기고 그래서 살짝만 건드려도 분노와 억울함이 솟아오르는 것 같아"


"난 정말 그냥 고쳐야 할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계속 안되니까 가끔 짜증도 내는 거지. 대부분은 아무 감정도 없이 하는 말이라고.


그걸 당신은 맨날 잔소리한다느니 지적한다느니 그렇게 생각하더라?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안 돼?"


"있는 그대로... "


순간 인영은 마음공부에서 강조하는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에 대해 떠올렸다.


그래. 나쁜 사람, 까다로운 사람, 매번 상처 주는 사람

판단과 해석을 떼어놓고 보니,

뭐 그렇게 심하게 비난을 한 것도 아니고,

애들 앞에서 화를 낸 것도 아니고...

그랬네... 그러긴 했네...


"그래, 맞아. 또 뭐라 한다, 또 지적한다, 또 상처 준다. 아파, 괴로워, 못살아.... 이야기를 붙여 붙여 눈덩이를 키운 건 나야.  


당신이 말하는 거 신경 쓸게. 고치려고 노력할게.

하지만 바로 고쳐지지 않는다고 뭐라고 좀 하지 마.

사람이 어떻게 한 번에 바뀌어~"


철의 마음이 스르르 녹는다.


"어제 우리 아들이 그러더라. '공부 잘하고 싶다고, 예습 복습 잘해야 한다는 것도 안대. 그런데 귀찮대!' 그거랑 뭐가 달라? 이론은 쉽지. 


난 말이야. 당신이 무엇을 아는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는 관심 없어. 그런 것보다 '지금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훨씬 중요한 거 아냐?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냉정히

채워 넣어야 할 부분도 알 수 있는 거지.


내가 어제 우리 아들에게 뭐라고 말해줬는 지 알아? 

실제 행동과 기대치가 번번이 충돌되면

결국은 더 하기 싫어진다고 알려줬어.

하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그러면서 더 안 하게 된다고.


해결 방법은 간단하지.

기대치를 낮추던가,

귀찮고 어려워도 일단 해보던가 중 하나지. 

세상에 그냥 되는 있나? 안 그래?


성철은 인영 쪽으로 몸을 틀었다.


"한 번에 안 바뀌는 거, 알아.

신경 쓴다는 말. 그걸로 족해.


사실 당신이 바로 인정하고 오케이 했으면

나도 그렇게 계속 잔소리하진 않았을 거야.


그런데 당신은 항상 내가 뭐라 하면 기분이 나빠져서 뚱해있거나 변명을 하기 시작한다고.


난 말이야. 당신이 색안경을 끼고

'남편은 나쁜 사람'이라고 믿는 고정관념이랑

'지적하는 건 다 듣기 싫고, 인정하기 싫다'는 고집을

좀 내려놓고 '노력해 보겠다'는 말 하나만 해주길 바랐어."


마음이 풀린 인영도  섞인 진심을 건넨다.


"고집은 당신이 더 고집이지. 굳이 끝까지 당신이 말하는 게 옳다고, 매번 와이프 잘못이고, 와이프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집 말이야.


나는... 당신이...

문제가 생기면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보단 먼저 우리의 문제로 봐주면 좋겠어. 실수를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단 잘하는 것도 인정해 주고 강점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주고..."


"그렇긴 하지. 와이프가 좀 느리고 둔한 건 있지만 장점도 많지. 착하고... 좋은점도 잘보고.. 나랑 달리 잔소리도 안하고.. 하하..


남편이 속이 좁아서 어쩌냐?

서로 이해하고 살아야지. 안그래?"


T

다음 날 새벽

인영의 일기는 성철을 향한 편지가 되었다.


***

지나고 보면 또 아무렇지 않아 지고.

돌아보면 그렇게 지나와서 다행인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도 당신도 본래는 사랑이란 이론을

아직까진 실감하진 못하지만


미워할 땐 지옥이다가

풀어지면 바로 천국이 되는 걸 보면


우리의 마음속 깊숙한 내면에는

사랑하고 싶은 진짜 마음이 있나 봐.


당신과 나 사이


기분이 나쁘거나 좋거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진실을 선택하는 일에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지만


자유는 솔직한 것.


자유롭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돌리지 않을게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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