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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Mar 14. 2024

떨면서도 내디디며 걷는 거야.

#11. 성철

좁은 길이 있어.

한쪽으론 높은 바위산이 있고

다른 한쪽으론 험한 절벽이 있지.


산이 무너질 것 같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도

내 맘대로 되는 건 나 자신뿐

오직 앞으로 걷는 것뿐이야.


다리가 후들거려도 걸어야지.

느리고 부족해도 걸어야지.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발은 옮기는 것뿐이니까.


걷다 보니 풍경이 바뀌어,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지고

산은 낮아졌지.

길도 넓어지고, 이젠 무섭지 않지만...

산과 바다를 바꿀 수 없는 건 똑같아.

여전히 나는 나의 길을 걷지.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날씨와 싸우지 않아.

우산을 준비하고

옷을 더 끼워 입고서

나의 길을 걸어.


알 수 없어도 걷는 거야.

떨면서도 걷는 거야.

할 수 있는 게 이거니까

작게 한 발이라도 내딛는 거야.


정직하게 앞으로_

도망치지 않아.


- 어느 날, 인영의 일기中

어영부영... 벌써 6월이네.


올해는 꼭 퇴사하려고 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흠, 그러고 보니 재작년에도

헉, 그러고 보니 3년 전에도…….


성철은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훌쩍 지나버린 시간에 당황했다.


이러다가 정말 빼도 박도 못하고 여기서 인생 종 치는 거 아냐? 요즘 같은 시대에 회사에만 매달려 있으면 바보 되는 건데.. 아, 진짜 오늘부터 작정하고 돈 되는 일 좀 더 알아봐야 하나?


그날 점심


마침 다른 팀원들은 모두 출장을 가고,

단골 한식집에는 신입 둘성철뿐이다. 


"야, 너네도 유튜브, 블로그 그런 거 하냐? 왜, 그... 퍼스널브랜딩을 해야 살아남는다면서? 얼마 전까지 미라클 모닝이 유행이더니 요즘은 다들 독서와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하고, 전자책을 쓰라고도 하고...


나도 여기 일 말고 딴짓 좀 해보려고 하거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건 많은데 막상 하려니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앞에서 수저를 놓던 준석이

옆에 앉은 입사 동기를 다.

 

"과장님~ 여기 P가 인플루언서잖아요.

유튜브 구독자가 만 명이 넘을 걸요?"


", 그래?"


눈치 없고 모지리 같던 P가

온라인에선 인플루언서라니

갑자기 P가 달리 보이는 순간이다.


성철의 시선을 느꼈는지 P가 서둘러 말을 잇는다.


"아, 수익은 얼마 안 돼요. 구독자가 좀 있다바로 돈이 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 구독자가 만 명이라도? 유튜브는 편집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릴 텐데, 역시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를 해야 하는 건가? 스마트스토어를 추천하는 사람도 있던데..."


가만히 듣던 준석이 짐짓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한다.


"과장님, 조심하셔야 해요. 제 친구 중에 거의 천만 원 넘게 깨진 친구도 있어요.


뭐 액수는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인 애들도 많고요. '대박, 이건 진짜 되겠는데?' 싶은 방법을 보고 홀린 듯 강의 결제하고, '너도 할 수 있다'는 말만 굳게 믿으며 구입한 책이 수십 권인데요... 시간과 비용을 쏟아부은 만큼 지식은 이미 준전문가급이긴 한데, 상황은 별로 나아진 게 없더라고요."


때마침 주문한 김치찌개가 나왔고,

성철은 오늘따라 안 매운 김치찌개에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댔다.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들고 10시도 되기 전인데,

아내는 벌써 졸린 눈이다.


'그러게, 낮에 애들 보느라 힘들 텐데, 굳이 왜 꼭 새벽기상을 고집하는지... 아, 그러고 보니 미라클모닝의 산 증인이 여기 있었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이거 완전 자기 계발 찐 선배구만.'


"여보~ 피곤해 보인다. 일찍 자.

근데 저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자기는 블로그를 어쩌다가 시작한 거야?"


"응? 블로그? 내 일에 관심 끄겠다던 사람이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 언제는 조회수의 노예라더니..."


아내의 반응은 뾰로통하다.


"노예는 내가 진정한 노예지. 이러다가 영영 회사의 종 신분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 당장은 못하더라도 퇴사를 하려면 뭔가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아서....

블로그에 뭘 쓰는 게 도움이 되긴 하는 건가?"


한동안 뜸하더니,

상철의 입에서 '퇴사'단어가 나오자

인영의 흐렸던 눈이 동그래졌다.


"왜,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또 팀장이 귀찮게 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일이 재미가 없다!"


성철의 입에서 탄식이 섞여 나왔다.


"이렇게 계속 싫은 소리 듣고 남의 비위 맞춰가며

회사의 부속품으로 사는 게 맞는 건가도 싶고."


"음...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사실 당신 정도면 지금 회사에서 입지도 확실하고." 


"일 잘한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나? 열심히 해봤자 호구되는 거지. 동기부여가 돼야 일할 맛도 좀 날 텐데, 요즘은 자꾸


 '아까운 내 인생,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만 들어. 좀 짜증이 나는 게 그러면서도 행동은 굼뜨다는 거야. 벌써 3년째 새해 목표는 '퇴사'고, 상황심각한데 몸이 안 움직이네. 간절함이 덜 한 건가."


"간절하지 못해서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진정한 간절함 아닐까?

맹목적으로 원하지 말고 동기를 잘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하긴, 당신은 꿈이라도 있으니 행복해 보이긴 해.

난 꿈도 없고, 벗어나고 싶어도 도망칠 곳도 없네.

이 나이에 인플루언서 하겠다는 것도 이상하고. 하하."  


"크크. 인플루언서라니,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얘기하는 것도 엄청 싫어하는 사람이...


비전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건 아니지만, 불안하니까

그저 남들이 좋단다고 따라 하는 건 정말 아니라고 봐.  

다들 해야 한다는 것 말고 내게 필요한 걸 해야지.


당신이 항상 하는 말 있잖아.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벗어날 수 없다면 해야 할 일이나 잘하라고.


어차피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인데,

자신의 일을 하찮게 보는 사람이 행복할 리 있어?


나중에 다른 일을 하더라도 관심 분야를 찾고

이제 그쪽으로 가도 되겠다는 자신을 갖기까지는

준비기간이 필요한 거고. 

그때까지는 지금의 일은 수입원이 되어주는 고마운 존재인데, 굳이 불평불만하며 다닐 필요는 없지.


똑같은 상황이라도,

'이 일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것 하고,

'나는 이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하는 거 하고는 차원이 다르잖아.


일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건

자신의 선택이야.


그런 의미에서 어차피 그만둘 일이라도

끝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아. 

그런 태도가 알지 못하는 좋은 기회를 열어주기도 하고."


"역시 고민을 많이 해본 해본 주제라 그런가

 '일'에 대해서는 청산유수네~"


그러면서 성철은 한편으론 어른답지 못하게 징징거린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있잖아. 내가 재밌는 사실 알려줄까요?

내가 요즘 지우 영어 가르쳐주며 느끼는 건데...

나, 사실은 집에서 애들 가르치는 엄청 귀찮았거든. 그런데 기왕 가르쳐주는 기회에 영어 실력도 올려볼까? 하는 생각을 했더니 갑자기 동기부여가 되는 거야.


지우 사면서 책도 사서 공부하고. 아예 기회에 콤플렉스였던 발음을 고쳐보자 마음먹고 팠더니 발음 실력도 엄청 올라갔어. 물론 엄마가 적극적으로 하니까 지우에게도 훨씬 도움이 되고...


당신은 그런 거 없어요?


하다 못해 팀장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포인트를 찾고, 리더십에 대해 공부하면서 바로바로 후임들에게 적용해 본다던가...


아니면 당신이 잘하는 기획 쪽에서 시키지도 않은 특별한 성과를 내고 보여주면서 적극적으로 뭔가 다른 걸 요구해 본다던가.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찾아서 흥미를 가져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글쎄, 뭐 그러고 보면 신입땐 그런 열정이 있어서 그런가, 무슨 일을 시키든 재밌게 한 거 같긴 해. 뭐라도 더 배우려고 하고."


"사실 어떤 일을 해도 마찬가지일 거야.


누구나 중요한 일을 하고 싶어 하고

중요한 존재가 되길 원하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나도,

하기 싫을 때도 있고

하찮게 느껴질 때도 있고

이게 맞나 싶어서 고민하기도 해.


회사일이든 회사밖 일이든

그런 시행착오를 겪어내고

그러면서도 애정을 키워

작은 일에도 정성을 쏟는 사람이

결국 큰 일도 하게 되는 것 아닐까?"


 "흠, 그러고 보면 대단한 일이란 게 뭐 있나? 싶긴 하지.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고."


"어디서 봤는데,

정말로 똑똑한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만족하는 사람보다

해야 할 일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사람이래.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다르게 생각하면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잖아.


내가 삶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바라는 것.

어쩌면 그건 더 큰 가능성이란 생각이 들어.


만약에...

내가 과거로 가서

진로를 고민하던 20대의 나를

만난다면 말이야.


무슨 일을 할까?라고 묻지 않고

어떻게 할까?라고 물어,

할 수 있는 일에

손에 닿는 부분부터

깊은 정성을 쏟아 보라고 말해주고 싶어.


나의 재능, 나의 비전

부풀린 '나, 나, 나'만 보지 않고


삶이 나에게 원하는 건 무엇인지.

내가 가진 무엇으로 헌신할 수 있을지.

어떻게 사랑을 키우고 전할 수 있을지.

알아보라고.


아마도 그땐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래.


내가 좋아하는 주제,

좋아하는 방식,

중요한 사람이 되고픈 욕심,

영향력을 끼치는 것.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보니

다른 가능성이 보이더라고.


필요한 일을 즐겁게 하는 법을 안다는 건

정말 행운인 것 같아.


아직도 자신에게 중심이  있긴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도 나 자신이 채워지니까

내가 궁금해하는 주제보다

내 고객들이 궁금해할 만한 주제에 대해 찾고 있더라고.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전할까 측면에서 고민하고

그러면서 나의 이해도 깊어지고.


결국엔 협력과 공헌 속에서

가치가 빛난다고 느꼈어."


"'억지로'말고 '기꺼이' 말이지?"


그러고 보니 아내에게  강조하던 '헌신' 아닌가?


성철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인영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섞였다.


"가족의 일이 나의 일이 되고

의무가 즐거움이 되고

희생이 헌신이 되는 순간!


고통스럽고 어렵기도 했지만

나는 살림과 육아를 하면서

예상 못한 축복을 여러 번 경험한 것 같아.

당신이 큰 역할 했지."


뜬 구름 같은 아내의 말이

100 프로 와닿진 않는다.


하긴,

현재로선 내 능력으로 사회에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회사 일이지. 어쨌든 고객사나 우리 팀장이나 우리 회사에게 내가 가치를 제공하고 있으니까.


남을 돕는 즐거움이라...


썩 끌리진 않는데,


성철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피어올랐지만

이윽고 하나의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을 하면

영혼은 지금보다 훨씬 더 기뻐하긴 하겠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가볍.


별 수 있나?

손에 쥔 거라도 잘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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