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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Mar 05. 2024

별거 없는 하루도, 미워하는 마음도...

#8. 인영과 지민

01.

인영


따스한 햇살과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아침

동쪽으로 난 창을 향해 눈을 감고 햇살을 쏘인다.


죽이고 싶고

죽고 싶던

숨은 어둠을

고요히 감싸 안아 스며든 빛에 녹인다.


감은 눈 안쪽으로 보랏빛 불그스름한 배경

알 수 없는 명암과 물방울이

둥둥 떠간다.


아픈 곳 없이 배고픔 없이

특별히 모난 것 없이

가족들 모두 이렇게 잘 살고 있어도


작은 자극에도 아파하고

극단으로 치닫던

마음의 환영들


그리 용감한 영혼은 아니라

무난한 길을 택하여


마음은 무너졌어도

밖으로는 생채기 하나 없이


내가 한 생각으로부터

내가 한 행위로 인해

한 치의 오차 없이 배우고 있다.


인영은 조금 더 친해진 자신과

조금 더 사랑스러워진 세상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편안함이 당연했다면,

버거움이 턱끝까지 차오르지 않았다면

마음을 다루는 법이

궁금하지 않았을 테지.


타고 못생긴 건 내가 먼저 먹었다.

싫은 소릴 하느니 내가 불편한 게 훨씬 나았다.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고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긴장을 하고서도 긴장한 줄 몰랐고,

가면을 쓰고서도 가면인 줄 몰랐다.


침잠하는 마음을 꽁꽁 싸매어

보기 좋게

좋은 게 좋은 대로-


그렇게 성실한 모범생은

착실한 직장인이 되었고

좋은 엄마이자

천사 와이프가 되었다.


억누르고 회피해 온 감정이 쌓이고 쌓여

터지고 나서야...


그래,


마음을 살피게 된 건

이전까지 관심사와는 다른 이유였다.


그것은

더 나은 내가 되려는 의지가 아니라

본래의 내가 되려는 몸부림이었다.


어느 주말 아침

인영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상하다고,

내 가슴을 내가 치고 있다고.

여느 아이처럼 가볍게 징징대는 아이 앞에서

엄마가 여기가 아프다며... 제발 그만하라며

있는 힘껏...


아이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에게도 미안했다.


그래, 나 힘든 가봐.

가슴이 답답한 것 같아.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안 괜찮았던 거 아닐까?

멀쩡한 척하는 게 익숙해서

안 멀쩡한 채로 너무 오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날 이후 인영은

감정을 살피고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02.

지민


"짜증이 나면 짜증이 났지

우울한 건 뭐야?"


J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배가 부른 거지.'

'덜 간절해서 그래.'

'의지가 부족한 거야.'


약한 마음은 그 마음이 잘못이라며

친구도 지민 자신도 그렇게 여겼다.


스물 다섯 가장 예쁠 나이,

지민의 세상은

대부분 회색이었다.


어슴푸레 저녁노을이 질 무렵

고단한 일상이 묻힌 동네를 걸어

독서실이나 자취집을 향하다가

문득 회색이 더 짙어지는 날이면


사무치는 외로움은

고통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서움에 가까웠다.


불안하거나

공허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면

서둘러 도망칠 곳을 찾았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뭔가를 먹거나


아무 생각 없이 다른 것에 집중하며

부정적 감정을 무시했다.


앉았다 일어났다

나갔다 들어왔다

그렇게 또 한심한 자신을 원망하고

다시 돌아와 허무함에 하루를 망치고...


무기력은 며칠씩 가기도 했다.



좀 더 발전한 후에는

적극적으로 긍정 마인드를

장착하려 노력했다.


목표를 써보거나

책을 보거나

더 힘을 낼 수 있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운동을 했다.


'고통은 나를 성숙시킨다'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적극적으로 '감사하기'도 해보았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이

단기적 치료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때론 회피로, 때론 정신승리로

상처가 나면 약을 바를 수 있었지만

임시처방일 뿐이었다.


며칠 괜찮다가도 다시 또 튀어나오는

내가 나에게 하는 부정적인 얘기들...


내면을 단단히 하는 근본적 치유 없이는

언제고 넘어지기 쉬운 상태.


지민은 여기저기 솟은 돌부리에

툭하면 걸려 넘어졌고,

여린 살은 쉽게 멍들어

그때마다 아팠다.



'많이 아팠지?'

'그래, 내가 많이 조급하구나.'


화도 불안도

모든 감정은 정당하다는 걸 알았을 때

처음으로 지민은 그동안

공감해주지 못한 자신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부정적 감정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고

불편한 몸의 감각과 괴로운 마음을 알아주기 시작하자

휘몰아치던 감정의 파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회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살펴보고 느껴주는 것만으로

고통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다.


내 마음을 바라보고 공감해 주는 것


사랑으로 '확장된 나'는

두려워하는 '작은 나'를

따스함으로 감싸 안을 수 있다.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하기'가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에 앞서 아픔을 충분히 느껴주는 수용 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제 지민은 부정적 감정이 찾아오면

충동적, 중독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신에게 말을 걸며 관찰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피하고 싶은 걸까?’

'어떤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도망가려는 걸까?’


회피하면 다시 돌아온다.

저항하면 반복된다.


"왜 이리 기분이 나쁘지?"

"너무 싫다. 우울해. 짜증 나."

"마음을 바꾸기 힘들어. 그래서 또 화가 나."

"사랑하기 싫어. 미워하고 싶어."


어떤 감정이 닥쳐도 밀어내지 않는다.

허용하기 싫은 마음까지도 허용한다.


'지민이가 지금 조급한 마음이 드는구나.'

'지민이가 일이 잘 안 풀리니 좌절감을 느끼는구나.'


감정과 철썩 달라붙어 도저히 떨어지기 힘들 땐

타인처럼 자신의 이름을 넣어 설명해 보기도 했다.

 보듯 나를 보니 어느새 마음은 넓어지고

노력하는 자신이 안쓰럽기도 했다.


'하루 이틀 망쳐도 괜찮아.'

'하기 싫어도 괜찮아.'


유난히 약한 마음은

잘못이 아니라

안을 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외면하고 억눌러 온 자신을 충분히 느껴달라고

감정은 그렇게 다시 또 나에게 왔다.



01'

다시, 인영


어린이집을 가려고 바둥바둥 준비하는 시간

거실에는 앙드레 가뇽의 '조용한 날들'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인영이 이불 정리를 하려 이불을 들치는 순간

햇살이 너무 밝아 먼지의 움직임이 하나하나 보였다.


첫째 아들이 이불을 함께 갠다며

조물 거리고 있었고...

둘째 아들은 엄마 이거 봐보라며

경찰차를 갖고 놀고 있었다.


순간 아이들의 목소리와

음악소리와 햇살이

하나의 환영처럼 느껴졌다.


환영이 사라질까 봐

아들을 꼭 껴안았다.


그때 알았다.

내 마음이 사랑이면,

아이들도, 남편도, 부모님도

내 앞에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걸.


가끔씩 인영은

어떤 장면이 너무 찬란해서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슴이 너무 뜨거워져

그 열로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헤이 구글,
조용한 날들 틀어줘~

강렬했던 경험 이후 인영은,

아이들과 투닥거리다 화가 날 때면

서둘러 AI 스피커에게 '조용한 날들'을 주문한다.


심각한 상황에서 빠져나와

잠시라도 멜로디에 집중하면

한 발 멀리서 보는 장면이 아련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나의 아이지만 미울 때가 있다.

그 마음이 당황스러워

미워하는 내가 또 밉다.


관찰자가 되어 보면

어리고 여린 마음이 보인다.


엄마의 사랑을 원하는 아이의 마음은

봐주지 않아 서운했고

외면당해 화가 났던

인영의 감정과 닮았다.


나에게 공감하는 것을 배우고

아이에게 공감하는 법을 알았다.


자신을 위로하는 노래로

리스트를 만들었다.


출구 없는 부정적 생각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아픈 마음을 잊으려 무언가에 중독되려 할 때

잠시 멈춰 자신을 다독이는 노래.


영감을 얻고 싶을 때 듣는 노래와,

걱정이 닥칠 때 찾는 영상도 있다.


나쁜 사람, 가해자라 믿었던 남편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한 아이들도

현재 내가 느끼는 감정과 모든 일의 원인은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있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난 후 인영은


나 자신과 나의 세상을 위한

장치들을 곁에 두었다.


그녀가 변했을 때

세상이 변했다.


그 외 다른 도움은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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