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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Feb 29. 2024

인정받고 싶어서 인정받을 수 없었던

#7. 인영과 성철

아직도,

그래 아직도..


눈치 보는 건 정말이지

아무 쓸모가 없다면서도...

눈치를 봐.


미성숙한 내가 부끄러워서

교만함이 덕지덕지 붙은 내가 부끄러워서

아직도 생생한 자아가 부끄러워서

나를 부끄러워하는 내가 부끄러워서...



벌써 한 시간째,

인영의 노트북 모니터 하얀 화면은

같은 자리에서 커서만 깜박인다.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다시 눈치를 보고


완벽해지려

고와지려

이래 저래 애쓰다가


결국 그곳에서 주저앉는다.


이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이런 걸 누가 본다고.

이건 일기장에나 쓸 내용 아닌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제가 아니잖아.

괜히 남의 시간만 뺏는 거 아닐까?



착하디 착한

인영의 할머니는

당신 마음은 꽁꽁 묻으신 채

남편 눈치, 자식 눈치,

심지어 작은 할머니 눈치까지 살피시며

그리 사셨다.


잘생기고 선비 같던

늦둥이 막내아들 인영의 아버지는,

어디에 가든 중심을 벗어나

펼치지 못하고 어슬렁어슬렁

사람을 피해 걸어 다니셨다.


할머니와 아빠를 가장 많이 닮은 인영에게

자신감은 그렇게 높은 산이라,

뼛속까지 깊은 골을 넘는 일은

시도조차 늘 버거운 일이었다.


불안과 부담이 섞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걸론 부족해.

더 잘할 수 있잖아.

지금 네 모습을 봐.

겨우 이 정도였어?

이것도 못하는 거야?


채찍질은.


나를 사랑하니까,

잘 되길 바라니 그런 거라 믿었다.


사랑 아닌 두려움

풍요 아닌 결핍


계산과 분석

엄격한 자체검열로

나오지 못하고 쌓인 이야기들.


아까워 버리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남긴 문장들.


묵혀진 메모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고 싶다.


자유로운 자만이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글을 쓸 수 있어.

나는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
그러니 내 마음의 창조물은 축복이 되지 못하고
나를 닮아 눈치 보며 숨어버리지.


누구나 비워야 할 것이 있다.

비워내는 일은,


켜켜이 쌓인 고정관념을 부수는 일이고

익숙한 생각의 회로를 끊어내는 일이다.

높은 산, 뼛속까지 깊은 골을 넘는 일이다.


'이제 됐다. 다 비웠다.' 했던 날도 있었지만

번에 되지 않았다.


고통스럽다가, 할 만하기도 하다가

그런대로 그렇게 서서히 넘어간다.



" 보기로 하고선

당신, 또 조회수 확인하고 있었지?"


언제 들어왔는지,

인영을 보는 상철의 얼굴이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그렇게 수시로 핸드폰 들여다보는 거! 반응에 매달려 주도권을 완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삶이잖아."


"알아. 나도 연연하기 싫은데... 알면서도 참 안 고쳐지네."


예상 못한 힘없는 반응

상철은 아내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흠... 내가 방법을 알려줄까?"


"뭔데?"


"글을 안 올리면 돼!"


"....

흐흐 맞는 말이네. 하지만 자기도 알잖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란 거."


"저기, 말이야. 이렇게 말해서 미안한데,

당신은 왜 그렇게 표현하지 못해 안달인 거야?

그렇게 비판과 칭찬에 예민할 거면

아예 작정하고 사람들이  보게끔 쓰던가.

난 진짜 이해가 안 돼. 돈도 안 되는 걸 왜 그렇게 하는지."


아차차! 며칠 전 대판 싸우고 다신 안 건드리기로 한 주제를 또 건드렸다. 날 선 반응이 나올법한데, 이번에도 아내의 목소리 차분하다.


"그러게, 나는 뭘 그렇게 보여주고 싶은 걸까?


사실 많이 생각해 봤어.


과거의 나와 닮은

또 다른 나를 위해 글을 쓰고 싶어.


당신 말대로

어쩌면 그들을 사랑해서라기보다

이기적이게도 그게 나의 행복이라서.


글을 쓰며 나와 그들을 위로하는 게

내가 찾은 즐거움이라서 그래.


습관처럼 반응을 살피긴 하지만, 이젠 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슨 승부를 보려는 것도 아니야... 어쨌든 결국 나는 글을 쓸 수밖에 없더라고.


"하하. 역시 당신은 참 의미도 많고 생각도 많아. 그래서 그렇게 일하는 게 정말 행복해?"


"응 행복해. 이런저런 생각 없이, 적어도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확실히 그래. 누가 뭐라든 머물고 싶은 그윽한 행복이 거기 있어.


지금 내가 가장 부러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 줄 알아요?


"어떤 사람인데?"


"양파껍질처럼 자신의 모습을 하나하나 벗겨

본래의 자신으로 살아가는 사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고

눈치 보지 않고 소신 있게 살며

온전히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


그동안 내가 하는 일 때문에 우리 많이도 싸웠지.

당신이 내 꿈을 막는다며 화도 내고 여러 번 징징댔지만

사실 나를 막는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어.

가장 큰 방해물이 바로 나였어."


가만히 듣던 성철이 괜히 목소리를 높인다.


"본래의 자신, 뭐 이런 건 당최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아무튼 당신,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당신만의 느낌을 좀 살려봐.


요즘 SNS든 뭐든 보면 죄다 비슷한 말만 하더라. 무슨 말투도 하나같이 다 똑같아. 난 책은 별로 안보지만 말이야, 독특한 문체를 보는 건 재밌더라고.


솔직히 책 읽는다고 사람이 확 달라지겠어?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보는 게 아니라 하는 게 중요하지. 참고로 나 같은 사람은 작가의 관점을 보는 맛에 책을 봐. 독특한 시각이 있으면 그나마 볼만하더라고."


"맞아. 그랬어. 마음을 열고 원래의 나를 표현하면 되는데, 규정에 맞춰 계획하고 포장하느라 괜히 뱅뱅 돌았어.


당신 말대로 사람들은 나한테 대단한 뭔가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 관점하나가 궁금한 걸지도 모르는데...


나 있잖아. 한참 동안 어딘가에 갇힌 기분이었거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알 수 없이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고... 평가를 받고, 요구를 만족시키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틀에서 헤매다가 가장 중요한 걸 잊어버렸던 것 같아."


"그렇다니까? 실체 없는 '세상 사람들'이란 환상에 그만 좀 연연하라고, 다들 살기 바쁜데, 당신 의견이 그렇게 중요하겠어?! 알아서 듣고 각자 판단하겠지! 당신 말이야. 당신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란 생각을 버려. 당신의 세계에서나 당신이 중심이지. 안 그래?  


그러니까 내 말은 SNS에 글 하나 올리면서 쓸데없는 장인정신까지 가질 필요 없다는 거야. 자신이 좋다면 눈치보지 말고 써. "


역시 성철은 뼈 때리기 전문이다.

아프지만 시원하다.

뭔가를 털어낸 듯 인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달라진 아내의 얼굴에

성철도 신이 났다.


"우리 팀에 신입 두 명 들어왔다고 했던 거 기억나?"


"응, 준석이라는 친구가 맘에 든다며."


"응 준석이 말고 다른 애. 매번 실수하는 놈이 하나 있거든? 그 애 특징이 뭔지 알아?"


"뭔데?"


"얘가, 다른 사람들 눈치를 그렇게 봐. 일할 때나, 밥 먹을 때나... 잘하려고 애쓰는 게 보여. 근데 그렇게 행동하면 본인도 불편하겠지만 상대방도 불편하거든.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근데 있잖아. 그러다 보면 꼭 실수를 한다?! 이쁨 받으려 노력하는 게 역효과가 나는 거야. 오히려 사람들이 안 좋아해. 아이러니지.


당신도 너무 잘 보이려 하지 마.

자기답게 쓰는 게 젤 나아. 암튼 내 생각은 그래!"


다음 날,

새벽인지 밤인지

인영이 눈을 떴을 때

하늘에는 아직 달이 걸려 있었다.


달은

저 멀리 커다란 달은,


특별히 자신을 알리지 않아도


나를 봐 달라고

내 빛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득하고 어필하지 않아도


그저 거기에 존재하며

자신의 역할을 함으로써

여기 멀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스스로 빛나는 달은,


의도하지 않아도

그 빛으로 다른 생명을 비추고 있다.


은은한 달빛이

어떤 아이에게 꿈을 심고

어떤 어른을 위로하며

어떤 연인들을 행복하게 한다.


어떻게 하면 세상이 나를 알아줄까?
어떻게 나를 증명하지?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인정을 갈구하는 자신이 애처롭기도 했다.


증명해야 했다.

내가 여기 있다고.


빛을 내기 위해

겉모습을 갈고닦았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환호하기도 하고

그 모습에 잠시 뿌듯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계속해서 부족한 것 같았다.

닦아도 닦아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끊임없는 갈증을 만들어냈다.


돈도 인기도 영원한 것은 없다.

하지만 진정한 빛은 영원하며 이미 있었다.


갈고닦기보다 먼저

겉껍질을 깨야 하는 거였다.


깨어진 후에 비로소

본래의 빛이 나오는 거였다.




스탠드를 켜고 익숙한 다이어리를 펼쳤다.

모두에게 인정받으려던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나도 모르게 순위를 매기고 어디쯤인지 계산했다.


글쓰기가 내 안의 것을 꺼내는 작업이라면

날 것의 세계,

닮아가고픈 초월의 세계가

거기 있다면

마땅히 나는 그래야겠지.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노래를 할 것이다.

누군가는 기획서를 쓰며, 누군가는 샤워를 하며,

운동을 하며, 직장을 다니며, 사업을 하면서도.


몰입의 순간!

우리는 예술을 만난다.


창조를 통해 내면의 빛을 드러내는 일

그 빛은 모두와 연결되어 있기에


자기 안의 빛을 건드리는 행위나 작품은

창조자와 보는 이의 시공간을 황홀함으로 멈추게 한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해하기 쉽게, 편리하게

보여주고, 보이는 것이라기보다

내 안의 충만해진 무언가를

꾸밈없이 나누는 과정.


자유롭게 쓰는 것이 세상에 닿기 위한

가장 나다운 방법이기에


괴롭히고 방황하게 했지만

늘 다시 돌아왔던,


욕망과 공포를 드러내어 비우라 했던

표현의 통로_

글이라는 예술을 사랑한다.


'그래. 그저 내가 느낀 나와

내가 경험한 세상을 표현하면 되는 거야.

진실되게. 그 순간만큼은 마음을 다해.'


더욱 간절해져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너무 간절해서 힘을 빼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 갈고 의지를 다져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너무 애를 쓰니 그냥 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확고한 목표와 거창한 계획이 필요한 사람도 있지만

알 수 없어도 그저 오늘의 계획이

하루를 살 게 하는 사람도 있다.

 

해야 하니까,

하지 못했다.


인영의 진정한 자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의미가 없어도 글을 쓰고 싶어 했다.


무언가를 해내고

뭔가 대단한 작품을 써내야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오래된 관념이

내면의 빛을 막아 머뭇거리게 했다.


인정받고 싶어서 인정받을 수 없었던 아이러니.

위대한 작품은 억지로 생각하지 않을 때 나온다.


아니 위대한 작품이란 개념도 잊고

이제는 저절로 쓰이는 글을 쓸 차례다.

정보도 분석도 더함이 없이

사랑이 차오른 상태로,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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