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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Feb 22. 2024

우월감과 열등감의 교묘한 줄다리기

#5. 지민과 준석

'휴,

그때 단톡방에서 나왔어야 하는 건데,

괜히 결혼 소식은 들어가지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지민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 옆으로 몸을 기댔다.


거울을 보니 생기를 잃은 여자가

오징어처럼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졸업한 지 1년 남짓,

오늘은 처음으로 지민까지 삼총사가 다 모였다.


지민은 반가운 척 호들갑 떨고,

틈나는 대로 맞장구치고, 

키지도 않았는데 이것저것 했던 말들이

지금 생각하니 바보 같고

다시 돌아가 지워버리고 싶다.


친구사이라도 속으로 그런 게 있다.


'내가 너보단 좀 낫지?'


못난 심보가 그래야 편했다.


새침한 M, 예쁜 J와 한껏 겉도는 대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왠지 더 못생기밋밋해 보이는 자신의 얼굴이 싫었다.


지민은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듯한 기분을 느끼며 카톡창을 열었다.


[야~ 이제 나 결혼하면 진짜 보기 힘들 텐데, 이번엔 고시생 신분 보호 차원이고 뭐고 그런 없어. 김지민 너도 꼭 놔와!]


지나간 대화 위에는 J가 보낸 모바일 청첩장이 있다.

클릭해서 한참을 봤다.


가슴 한구석이 허전하다.


J와 M 얘네들은 내가 불편해서

서서히 거리를 두고 있단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솔직히 요즘 같아선 차라리 어디 이라도 들어가서 혼자 살면 좋겠다. 말이 좋아 고시생이지, 이도저도 아닌 백수 신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잘 나가는 친구들 앞에서 가면을 쓰는 것도 싫고, 아무튼 인간관계는 피곤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이러다가 끝도 없지. 힘내자, 김지민!'


축 쳐진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샤워를 하니 한결 나아진 기분이다.

책상에 앉자마자 또 다른 방해꾼이 등장한다.

번뜩 스친 또 다른 생각. 이번엔 K선배다.


'아, 맞다. M이랑 준석 선배랑 같은 동아리였지. 어쩌면 결혼식에 가면 준석 선배를 볼 지도 몰라. 하긴 요즘 살도 찌고 초췌한데 차라리 안보는 게 낫지... 아, 근데 그날 무슨 옷을 입지? 이번에 겸사겸사 옷을 하나 살까?'


아무래도 오늘 공부는 땡 친 것 같다.



한 달 후,

J의 결혼식


지민은 술래도 없는데 숨바꼭질을 하듯

구석진 장소와 어두운 곳을 찾아다녔다.


머리도 맘에 안 들고, 옷도 맘에 안 들고, 신경 쓴 화장도 어색해서 그냥 안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꾸역꾸역 참석했던 결혼식이 그런대로 끝나가고 있다.


"자 이제 신부 쪽 친구분들 앞으로 나오세요~"


M과 함께 주인공 뒤로 자리를 잡던 지민의 심장이

순간 쿵하고 내려앉는다.


준석 선배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곁눈으로 분명히 보았다. 지민을 발견한 준석의 눈이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색하게 앞만 보며 포즈를 취하고 사진기를 향해 스마일을 날렸지만 지민의 시간은 아까부터 지금까지 흘낏 본 준석의 얼굴에서 정지해 있다.


어벙벙한 채로 단체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데,

준석이 다가온다.

...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어이, 지민~ 오랜만이다. 잘 지내?"


지민은 서둘러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을 다독였다.


"네, 선배도 취업하더니 조용하네요. 일은 할만해요?"


"어, 그냥 그렇지. 언제 회사 근처로 와라. 한번 사줄게."


"아뇨,  

밥 말고 술 사주세요. 퇴근시간에 맞춰 갈게요.."


...

어디서 이런 용기가 솟았는지

생각할 새도 없이 뛰쳐 나간 말에

준석도 지민도 당황하여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하하! 그래. 내일모레, 월요일 저녁 어때? 콜?"


"콜"


지민은 정적을 깨준 준석의 말에 안도하며

짧게 콜을 날린 후

서둘러 식장을 빠져나왔다.


J는 옆에서 따라오며 난리가 났다.


"야, 너 뭐야. 아직도 준석 선배 좋아하는 거야? 이거 완전 오늘 분위기 봐서는 잘될 것 같은데? 근데 저 오빠도 진짜 웃기다. 전에도 정말 사귈 것처럼 하다가 결정적인 한방 없이 애매하게 혼자 취업해서 사라져 버리고. 암튼 전적이 있으니 조심해. 저런 사람이 은근히 자기가 인기 많을 걸 즐기더라고. 여자들 힘들게 하고."


뭐라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일단 지민의 마음은 당장 내일모레로 향해있을 뿐.




"고시공부 한다며?"


처음 마셔보는 따뜻한 술 한 모금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 지민 어떤 질문이라도 자신 있다는 듯 살짝 격양돼 있다.


"네! 저 공부한다고 살도 3킬로나 찐 거 있죠? 사실 선배가 당장 월요일에 보자고 해미룰까도 고민했어요.

살도 좀 빼고 원래 제 모습으로 보고 싶었는데..."


"하하. 야, 3킬로 덜 찐 모습은 원래 너고, 3킬로 찐 모습은 네가 아니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보기엔 똑같은 김지민인데. 우리 누나 생각난다. 내가 보기엔 차이도 없는 머리 스타일 가지고 맘에 안 든다고 다시 감고 다시 감고 하던데... 그거랑 비슷하네."


'내가 보기엔 똑같은 김지민인데...'


아, 이 말은...


빛을 쬔 기분이다.


사실 지민은 요즘 하라는 법공부는 안 하고 심리학 빠져있다.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 보기 시작한 책들이 지민의 호기심을 끌어들였고, 이 책만 책까지 하며 보기 시작한 책들이 벌써 여러 권을 넘어서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책에서 숱하게 이야기하던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가 소중하다'는 말의 리얼 버전을 들은 것이다. 역시 준석 오빠는 다르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살쪄도, 못해도 그대로의 나를 받아준다는 거요. 이 모습은 본래의 내가 아니야! 이것보다 훨씬 나아!라고 하고 싶어요. 못난 나는 인정하기 힘들어요.


오빠,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저보다 어려운 사람이나 비슷한 형편의 친구가 편한 것도 다 열등감 때문일까요? 잘 나가는 사람보다 못한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려고 하는 게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라면 그것도 참 슬픈 일인 것 같아요. '무늬만 베스트 프렌드'도 참 씁쓸하고요."


준석은 솔직한 지민이 좋다.


"음... 나도 그런 생각해 본 적 있어. 우월감 뒤에 숨어있는 열등감. 사실은 나,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거든. 열등감이 커서 그랬던 거야.


지민이 네가 예전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


'내 잘못이 아니라고,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고'


열등감도 마찬가지야. 다들 현재보다 더 나은 나를 바라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격이 클수록 괴로움도 느끼고, 내가 욕망하는 걸 가진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지고. 누구나 그렇지.


그래서 열등감을 인정하는 건 용기인 것 같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욕망을 인정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거지. 더 나아지고 싶은 욕망은 절대 나쁜 게 아니잖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열등함을 제대로 볼 용기를 내지 않으면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소모하게 돼. 이를테면 '내가 대단하거나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과장하고, 설득하고, 괜찮은 척하고 이것저것 안 해도 되는 일을 벌이는 거지. 사실 난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어"


뭔가 생각난다는 듯 지민이 말을 받았다.


"맞아요. 괜찮은 나를 보여주려고 할수록 뭔가 깊은 두려움이 스며들고 감추고 싶은 것들이 많아지고 그런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어떤 날은 맘에 안 드는 자신이 혐오스럽고요.


선배는 '존재로서의 나를 존중한다'는 말이 실천이 되나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한 것 말고요."


"뭐, 확신할 순 없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아. 어느샌가 남들의 평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나 자신의 진짜 모습과 목표에만 관심이 가더라고. 물론 열등감은 여전히 있지만 그건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이고 나 자신과의 문제이지. 남과의 비교를 통해 흔들리고 괴로워할 일은 아니야. 생각해 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나를 어떻게 보든 그건 그 사람의 문제고.


그리고 있잖아. 사실 다른 사람들도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지에만 관심 있지, 타인 자체엔 별 관심이 없거든. 다들 자기 자신만 생각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충분히 당당하고 괜찮다면 '그런가 보다' 하는 게 남이야.


중요한 건,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지. 스스로를 패배자로 인식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그렇게 보지 않아."


"건강한 우월함을 갖고 싶어요!"


조명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볼 위로

지민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였다.


어쭙잖은 우월감이 아니라 진정한 우월함을 갖추는 건 말이죠. 

정말로 멋진 일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은 열등함을 끌어안을 때 가능한 일이죠."







둘은 9시가 다 되어 이자카야를 나왔다.

내심 데려다주길 기대했지만 준석은 버스 정류장 앞에서 안녕을 고했다.


지민은 변치 않는 우정 분위기가 여전히 아쉽다.

하지만 선배와의 대화 내용은 언제나 만족스럽다.


***

정보 과잉 시대, SNS를 도구로 소통하고 협업하는 세상에서

무시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지만,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까지 알아야 하는 버거운 현실


열등감과 우월감의 오묘한 줄다리기 속에서

자기만의 신념으로 똑바로 서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는 세상이다.


조그만 자극에도 '잘 못 살고 있다'라는 회의감이 들고,

그렇게 왜소해진 나는 자칫하는 순간 모자란 인간이 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

존재자체로 이미 완벽한 우리


뭔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뭔가를 해내지 않았더라도

'존재로서의 나'를 존중해야 한다.


남과의 비교에서 승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어제보다 나은 나로서

우월해지고자 하는 자신을 격려할 수 있다.


***

지민은 여전히 자신에게 높은 점수를 주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는 노력을 더 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야만 막연한 불안과 조급함을 떨치고

변화를 만들며 나아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격려하고 존중하며

나의 속도로


SNS 속 꾸며진 이상과 남들의 꿈을 좇느라

곁에 있는 행복을 놓치기에는

나의 인생이 너무 소중하다.


지민의 마음이 따스히 차오른다.


한참을 수다하고 헤어졌지만

에너지가 한가득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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