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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Feb 15. 2024

회사원 K 씨 말고, 반짝반짝 빛나는 김준석

#3. 준석

지민과 헤어진 준석

얼마 뒤 있을 공연 준비를 위해

곧장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무대의 열정이 좋아서 시작한 연극이었다.


커튼콜 때 인사하는 배우들을 보면 부럽도록 멋져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처음 연극 동아리에 들어간 날은 가슴이 뛰니 '이게 내 길이다' 싶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벌써 네 번째.

올해 공연에서 준석은 제법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제 준석의 가슴은 시큰둥하다.

재능도 있지만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나지 않는다.

좋아하지만 자유롭지 않다.


'진짜 좋아하는 거 맞나?'


지민에게 했던 네 안의 진실을 따라가란 말은

준석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내 안 깊은 곳,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

내 안의 진실은 뭘까?'


안 읽히는 대본을 들고 동아리방을 나왔다. 동그랗게 말린 시나리오처럼 길 잃은 채 건물을 서성이다 밖으로 나왔다.


모이기로 한 시간까지 30분 남짓,

준석은 작정하고 좀 걷기로 했다.



동아방이 있는 생활뒤로 낮은 산이 있었다.

가끔씩 등산복 차림의 어르신들이 내려오시는 걸 보았지만 학생들은 거의 올라가지 않는 산이다.


생각에 잠겨 무작정 산에 오른 준석은

문득 높은 나뭇가지 끝 나뭇잎 사이 하늘을 올려보며

고요한 행복을 느꼈다.


빛은 안심하라는 듯 그를 감싸고 있었다.


끌리듯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서서히 서서히

연극 연습도 사리지고

현실도 사라지고

어느

피아노 앞에 앉은 어린 자신이 나타났다.


"뉴스 보잖아. 시끄러워!"


이제 막 시작한 연주는

아버지께 금세 저지를 당했지.


거기까지가 기억의 전부였는데

오늘은 서운함 너머 이전 상황까지 생생히 떠오른다.


아버지는 드라마 <모래시계>에 나오는 '백학'이란 곡을 좋아하셨다. 굵은 목소리로 '우우우 우우~'하고 전주 부분을 따라 부르실 때 지그시 눈을 감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게 준석은 참 좋았다.


하굣길 집을 지나쳐 시내에 나가 악기를 파는 가게에 갔다. '백학'의 피스를 사서 몰래 연습했다. 아버지께 들려드리고 싶었다.


'내가 연주하면 아버지는 노래를 부르시겠지?'

...


"시끄러워!"


거부당한 어린 마음이 왈칵 다가와 사무친다.



빛나고 싶었다.

알아주지 않는 아버지가 잘 보시도록.

바쁘시던 엄마의 눈에 들게끔.


평범한 직장인 말고

반짝반짝 빛나는 김준석이 되고 싶었고

티 안 나게 숨어있는 조용한 일 말고

모두가 알아주는 대단한 일로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유쾌하고 재능 많은 준석은 어디 가나 인기가 많은 편이었지만 숨겨 놓은 자신만의 엄격한 잣대가 있었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중요하거나 특별한 사람으로 부각되지 않으면 이내 자신이 못마땅하고 무가치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일까?

남들이 다 하는 건 싫었다.


특별함에 끌린 도전, 

열정으로 출발한 생기로움은

평판에 매달려 금세 시들해지기 일쑤였다.


아무리 능력 있고 반짝 반짝이 좋아도

빛나는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견뎌야 시간과 쏟아야 노력이 있건만


준석은 매번 초라한 단계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스킨 스쿠버 강사가 되기로 했을 때도

사진을 찍으러 다녔을 때도

이리 찔끔, 저리 찔끔


설렘에 부풀던 초반의 열정이 무색하게

취미가 아니라 직업으로도 진지하게 생각했으면서


시들어질 때면 준석은

똑같은 레퍼토리를 내밀었다.


'해봤는데, 별로 재미가 없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야.'


이번에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극은 내 길이 아니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말대로 '의지가 부족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의지를 탓하기엔 준석에겐 더 깊은 문제가 숨어있었다.


'제대로 못 보여 줄 거면 안 하는 게 나아. 무가치함을 견딜 수 없어. 언제나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어. 무능함을 보이지 않을 거야. 그러니 차라리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사람으로 남을래. 난 원래 특별하고 잘하는데,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데 말이야... 그저 더 하지 않을 뿐이라고!'


안쓰러운 자기기만이었다.


정말로 원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자신이 없으니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건가?


정말로 자신이 없는 건가?

아니면 자신 없다는 말로 승부를 피하는 것인가?


해봤다면서,

정말로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해보았나?


성실하고 에너지 넘치며 생산적인 사람이 되려 했던 건 자신의 가치를 느끼려는 몸부림이었다.


생각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공연을 하거나 끊임없이 움직이고 뭔가를 변화시키고 세상에 내놓아야만 '넌 사랑받기엔 모자라. 부적격이야' 하고 할 것 같은 두려운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준석에게 일은 사랑과 존경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을 잘해서 인정받고 멋진 관계를 구축해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진정으로 좋아하고 잘하는 일

나다운 일이어야만 했다.


'나'를 모르고서 '나'다움을 찾아다녔다.


진실을 마주한 준석은 허탈해졌다.


반복될까 봐.

끝이 없을까 봐 두렵다.


이것저것 유난만 떨었지

이루어놓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 난 무얼 해야 하나?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나 들어왔지만 다행히 연습은 시작 전이었고 동아리방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가까이 가니 P의 취업 소식이다.


평소 취업엔 관심 없던 준석이지만

오늘만큼은 직장인이 된 P가 진심으로 부럽다.


"고생하더니 잘 됐네!"


준석에 이어 이번에는

w가 P의 어깨를 톡톡 친다.


"노예가 된 걸 축하해. 하하. 너도 얼마 안 돼서 나오겠지? 내 일한다. 사업할 거다. 하면서."


P의 대답은 의외로 담담했다.


"글쎄, 알 수 없지 뭐. 알 수 없으니 일단 주어진 일은 충실하게 해 보려고.


쓰는 족족 떨어지는 원서를 쓰면서도 그랬거든. 자존심도 상하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요즘은 취업은 대세도 아니라는데, 나도 다른 쪽을 알아봐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근데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뭐 창업 아이템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그냥 다른 생각 안 하고, 먼 미래 안 보고 하루하루 원서 업그레이드에만 신경 쓰고 제출하고 그렇게 살았어. 근데 되고 보니 생각보다 좋다! 앞으로도 그냥 오늘만 살면 되지 않을까 싶어."  


'알 수 없으니,

그저 오늘만.'


준석은 망치로 맞은 듯 멍해졌다가

이내 P가 고마워졌다.




그날 저녁.


"그러고 보니 선배도 저랑 비슷한 부분이 있네요."

 

알 수 없다는 표정의 준석에게 지민이 웃음을 지었다. 저녁에 기숙사에서 다시 마주친 지민은 이번 남는 식권으로 밥을 쏘겠다고 했고, 준석은 식판을 앞에 두고 낮에 숲에서 생각들을 펼치던 중이었다.


"자책하는 거요."

...



선배 잘못이 아니에요.


선배는 그저 이해받길 원했고,

관계 안에 있길 원했고,

받아들여지길 원했을 뿐이잖아요.

박탈감이 있을 때 다른 무언가를 찾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있는 것과 그 욕구로 인해 대리 만족을 구하는 건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그래요.


선배가 잘나긴 했지만, 어떻게 매번 밝고 자신 있고 생산적일 수 있어요. 통제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내지 마세요. 지금까지 뭔가 해놓은 게 없다는 걸로 실패자라 생각할 필요도 없고요.


선배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면 좀 어때요? 자신을 좀 풀어놔 봐요. 그래도 선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계속 선배를 좋아할 거예요.



받아들여짐. 이해. 따뜻함.

그래. 받아들여짐을 원했다.

이해받길 원했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길 원했다.


생산적이지 않아도

능력으로 뭔가를 보여주지 않아도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고,

내 앞의 저 사람이 해줄 수도 있다.


아무리 잘해도 아쉬운 사랑. 어릴 적 덮어둔 상처가 참았다가 나중에야 터졌다. 싫은 소리, 충고에 약했다. 상대의 말이 하나하나 틀리지 않아도 그대로 이해받길 원했다. 잘못한 거 말고 잘한 걸 먼저 봐주길 바랐다.


여기 내가 있다고...

사람들이 봐주길 원했다.

겉돌고 있었다.

내가 나를 받아주지 않아서

냉정한 현실을 스스로 만들었다.


'난 정말 무엇을 원하는 거지?'


수도 없이 했던 질문이었다.


순간 준석은 어쩌면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은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특별한 내면의 느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따스함, 빛남, 연결감, 생동감, 자유로움.

그 느낌은 이미 있었다.


대체된 목표.

재능을 보여줌으로써

나를 드러내고 싶다는 갈망


그러나 깊은 갈망은

결국 사랑으로 대체된다.


가장 갈망하는 것이 주는 느낌!

그것은 지금도 있었다.


***

준석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특별함에 대한 욕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욕망의 달성으로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그로 인한 집착이 문제였을 뿐.


연극 마무리도 최선을 다할 것이고

남들 다 하는 취업 준비도 해볼까 한다.


잘 모를 때는 다수가 가는 길을 택해도 괜찮다.

어느 길이든 내가 걸으면 내 길이지.


도망치지 않는다.

이제 뛰어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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