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진짜 일 안 하고 돈만 받아가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뒤처리는 고스란히 성실한사람들의 몫이지. 게다가 일 못하고 위에 쌰바쌰바만 잘하는 인간들이월급은 더 많고 직급도 잘 올라가고...
'에이, 더러워서 정말.'
이 맘 때면 찾아오는 퇴사 욕구가 다시 솟구친다.
소주가 당기는 날이다.
여보, 나 왔어.
평소와 달리 술과 안주거리를 손에 들고 온 남편을 인영은 평소보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며칠 째 축 쳐진남편을 보며 대화할 타이밍을 찾던 인영이었다.
아이를 재우고 9시 반쯤
부부가식탁에 마주 앉는다.
"자기, 안 피곤해? 혼자 마셔도 되는데..."
"뭐야, 청승맞게. 소주는 잘 마시지도 않는 사람이 혼자 마시려고? 나도 먹고 싶어서 그래."
성철은 인영의 대답이 내심 반갑다. 이런저런... 아들 얘기, 부모님 얘기등이 오가고 서서히 성철의 회사가 주제로 떠오른다.
아내는 능글맞은새 팀장도, 앉아서주식차트만 본다는 노땅도 몹쓸 사람이라며 거들었다. 지원군을 얻은 성철은 속내를 털어놓는다.
"아, 때려치우고 싶다. 퇴사하고 싶어도 먹고 살려니 어쩔 수가 없잖아. 당신이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경민이 학원도 보내려면 앞으로 더 빠듯할 텐데..."
억울하고 자존심도 상했을 남편을 무조건 위로하려던 인영의 마음이 순간 '당신이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에서 방향을 튼다.
"돈을 못 벌어서 그렇지 내가 일을 안 하는 건 아니지. 솔직히 내가 집에 없으면 당신도 경민이도 더 힘들 텐데... 그리고 뭐 살림은 쉬운 줄 알아요? 나도 집중해서 일하면 지금이랑 아웃풋도 다를 거라고."
"책 보고 소설 쓰는 게 무슨 일이야? 돈을 벌어야 일이지. 차라리 일이 아니라 취미라고 해. 나도 당신처럼 천직이니 뭐니 팔자 좋게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면 좋겠다. 당신은 현실 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어."
성철은 팀장도 아내도 편한 얼굴로 자기 좋은 일만 하려는 사람들이 밉다. 누군 좋아서 이러나? 돈이 그냥 벌리냐 말이다.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들 주변에서 죽어나는 사람들은 나처럼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자주 있던 패턴이다.
자신의 일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취급당할 때마다 인영은 분노하기도 했고, 속상함이 차올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을 그만두는 것 말고 관계를 그만두는 것 말이다.이성적인 성철은 상상도 안 해본 일이 감성적이고 극단적인 인영의 마음에선 종종 벌어지고 있었다.
몇 번을 나락에 떨어졌다가 간신히 나오고
반복된 싸움의 원인을 들여다보며
인영은 가장 어려운 이 문제야말로 포기하고 도망쳐서는 안 되며 받아들이고 해결해야 할 자신의 과제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남편은 상처 주는 말을 통해 인영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인영 스스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분, 내면 깊숙이 가진 '이런 일로는 돈이 될 수 없다.'는 믿음을 부수지 않는 한 그녀의 '자신 없음'은 늘 이렇게 아픈 상황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성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피해를 보고 있다. 삶은 고되다'는고정관념을 버리지 않는 한 매번 비슷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 터였다.
흥분하여 쏘아붙이려던 인영은
한발 멀리서 남편과 자신을 알아차린 후
목소리를 낮췄다.
"여보, 난 당신이 편안했으면 좋겠어. 조금 더 벌지 않아도 좋으니 당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기를 나도 바라. 하지만 좋아하는 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 그건 며칠씩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야.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지친 거라고. 당신이 원하면 휴가를 내서 얼마간 쉬어도 좋아. 혼자 여행을 다녀와도 찬성이야.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더 잘 살기 위한 휴식이 되었으면 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철은 아내의 말을 듣는데 쉬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 일에서 손을 놓을 자신도 없다. 원할 줄도 모르고, 쉴 줄도 모르고 그저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데 뾰족한 수도 없고 이유를 찾지 못해 그냥 돈돈돈 거리고, 밥벌이를 핑계 대고있을 뿐이었다.
팔자 좋아 보이는 아내도,
회사를 놀러 다니는듯한 사람들도
내가 못하는 걸 해서 미운 것이다.
나는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걸 뻔뻔하게 하니까.
다음 날 아침,
성철의 출근길이 생각보다 가볍다.
'대충 하지 뭐.'
타고 난 일센스로 깔끔하게 보고 내용을 정리한 성철은 어제의 스트레스가 무색하게 팀장이 부탁한일도 잘 마무리했다.
'당장 퇴사 안 하면 죽을 것 같더니...'
홀가분함에 옥상으로 올라간 성철은
이게 직장인인가 싶어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아마 정년까지 이러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덜 하려나? 하긴 나도 우리 팀 나이 든 밉상처럼 될지도 모르지.
"네! 오늘은 팀장님도 안 계시고 금요일이라 그런지 사무실 분위기가 설렁설렁하네요. 말씀하신 파일 정리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아무도 안 계셔서요. 하하."
"흐흐. 이제 세 달 정도 되니까 분위기도 좀알겠지? 요즘 신입들 3개월이 고비라던데. 할만하냐? 야, 넌 인마. 대학도 잘 나왔던데 왜 여기 온 거야?"
"과장님 같은 분도 계속 다니시는데요. 뭘. 우리 팀 브레인이자 중심이시잖아요. 과장님 일하시는 거 보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성철은 붙임성 좋은 후임의 말이 싫지 않다.
"야, 넌 늦기 전에 니 거 만들어 놔라. 회사에만 충성하다 보니 이젠 독립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 줄도 모르겠고...버티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
"에이, 말은 그렇게 하셔도 과장님 하시는 프로젝트에 애정이 있으시잖아요. 다른 분들과 있다 보니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그러신 거죠. 지금 전 딱 과장님처럼 일 잘하는 게 목표인데요.
과장님, 모르셨죠? 제가 신입치고 나이가 많잖아요. 여기 입사하기 전에 이것저것 많이 해봤어요. 좋아하는 일 하겠다고 사진, 운동, 연극도 해보고요. 나다운 일 찾겠다고 여행도 다니고요. 결국 다시 제자리더라고요. 그러다가 알았어요.
사실은 정면 승부를 피해왔다는걸요.
원하는 일을 찾겠다며 합리화하고 미룬 거예요.
겁나서고민을 핑계로 시간을 벌려고 했어요.
취업하기 싫다며 계속 도망쳤는데요. 막판에 몰려서 정신 차리고 그때부턴 안 가리고 원서 넣었어요. 신기한 게 미래를 포기하니 해야 할 일이 선명하게 보이더라고요. 더 신기한 건요. 회사에 오니까 일이 너무 재밌어요. 전 직장인이 저랑 절대 안 맞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나름 잘 맞는 거 같아요."
준석의 말을 듣자니
어제 아내가 했던 말이떠올랐다.
'현실 도피'
'그래 밥벌이로 합리화했을 뿐...나는 퇴사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구나.나는 그저 현실에 지쳐 도피처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크, 자식이... 나보다 낫네.'
그날 저녁
성철은 별일은 없었지만
아내에게 야근을 한다고 말한 후
저녁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비어있는 준석의 자리를 보니
신입시절 열정적이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하라는 일이면 합리적인지 효율적인지 따지지 않고 열심히던 시절이 있었지.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다 보니 자연스레 좋은 평가가 따라왔다. 생각해 보면 이곳에서 좋은 기회도 많이 얻었다. 최근 들어 불만만 떠올려 그렇지 그런대로 다닐만한 곳이다.
조용한 사무실을 괜히 한 바퀴 돌고 나서
익숙한 자신의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신 성철은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펼쳐 떠오르는 생각을 적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로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떻게 원하는 일을 찾을지, 좋아하는 일을 할지, 잘하는 일을 할 지도 한 번쯤은 궁금해한다.
지금 당장 목적지를 모른다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길을 걷다 그 길이 익숙해질 때쯤 자연스럽게 더 나와 잘 맞는 길을 걷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지. 이직이 될 수도 있고 창업이 될 수도 있다. 생각 못 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