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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Feb 27. 2024

완벽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만큼만

#6. 준석과 지민

준석에겐

박스가 하나 있었다.


잘해야 한다는 박스



그곳에 한 번 들어가면

아니 갇히면...

나오는데 한참 애를 먹었다.


지민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준석은 다시 박스를 찾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이제 어쩌지?'


다시 본 지민이 여전히 좋다.

그러나 또 여전히

다가오면 동시에 도망가고픈 충동을 느낀다.


상대가 소중하게 느껴질수록 더욱

중요함이 더해질수록 더 간절히

강력한 의미부여와 함께 놓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은 관성대로 다시 박스를 가져왔고, 생각은 늘 벽을 쌓아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끝을 맺었다.


'아니야, 나는 완벽한 남자친구가 될 수 없어.

부족함을 들키면 언젠가 그녀도 떠나겠지.'


누군가가 삶에 들어온다는 건

아프고 못난 부분까지 공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준비되지 않았고

끝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더 이상 마음을 주지 않고

시작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다.


일뿐만 아니라 관계에서도

취약함을 감추고 싶을 때마다 준석은

서둘러 박스를 세우고 그 안에 숨었다.


약간의 고통과 답답함이 느껴져도

상자 안은 편하다.


완벽주의는 취약함을 감추기 위한 도구였다.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인다.


아무도 모르는 무표정한 준석의 얼굴이

시간이 되자 익숙한 듯 다시 드리운다.


'건강한 우월감을 갖고 싶어요!'


눈빛을 반짝이던 지민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감당할 수 없을까 봐 감정을 마비시켰다.


'잠이나 자자.'


항상 그랬듯

이번에도 이렇게 넘기면 된다.

그렇게 넘어갈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피곤한 몸으로 출근한 준석은

스트레칭이라도 할 겸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이, 신입~ 웬일로 이 시간에 올라왔어?"


어김없는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던 상철이 얼굴을 펴며 묻는다.


"선배야말로 아침부터 왜 이리 심각하세요?

사모님이랑 싸우셨어요?"


몇 번 출장도 같이 다니며 제법 터놓는 사이가 되니 이제 얼굴만 봐도 대충 감이 잡힌다.


일과 성취가 중요한 준석과 달리

성철의 삶은 가정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성철은 아내와 아들을 끔찍이 아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가족에게 문제가 생길 때 받는 스트레스는 회사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에이, 몰라! 암튼 성격이 너무 달라서...


준석이 오늘 약속 있냐? 이따 끝나고 가볍게 잔 어때? 오늘은 진짜 집에 가기 싫다."

 

"예, 그러시죠."


어제에 연이은 술자리가 부담이 되었지만 흔쾌히 승낙했다. 한편으론 마음에 남아 걸려있는 지민 때문인지 성철의 제안이 반갑기도 했다.


지민과 갔던 이자카야에 가서,

지민과 앉았던 자리 근처에 앉았다.


'이 정도야 뭐'


상자 안에서는

혼자 어떤 생각을 하든

크게 상처받을 일은 없다.



...


"준석이

딴 건 몰라도 극단적인 여자랑은 만나지 마라. 이혼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술기운이 오른 성철은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고, 얼마나 심하게 싸우셨으면 천사 사모님이 그런 말씀까지 하신 거예요."


준석은 짐짓 놀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다.


"난 있잖아. 아무리 안 맞고 이해가 안 되고 힘들어도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하지 끝장을 보려 하진 않거든. 그러니까 '이혼'이란 단어가 아예 개념에 없다고. 머릿속에 그 단어가 없으니까 최악의 상황 같아도 끌고 가려하고 그러다 보면 좋아지기도 하고 그런단 말이야.


관계라는 게 그런 거잖아. 어떻게 매번 좋냐? 사람도 그래. 어떻게 장점만 있고 다 이해가 되고 그렇겠냐고. 그냥저냥 부족해도 맞춰가면서 사는 게 사람 사는 거지. 안 그래?"


가만히 듣던 준석이 대답했다.


"과장님, 그러고 보면 전 제가 극단적인 거 같은데요? 하하...."


"그래?"


"네, 뭔가 완벽하지 않으면 시작하기도 겁나고요. 부족하다 싶으면 하기 싫어요. 그러니까, 그런대로 그냥 해보는 게 아니라 제대로 못할 거면 하지도 말자는 주의죠. '모 아니면 도'니까 이런 게 극단적인 거 맞죠?"


"그러네~ 크크.. 이 자식 극단적인 놈이네. 하하.


준석! 내가 너 일하는 거 보면서도  번 느꼈거든. 일 머리도 있고 센스도 있는데 말이야, 가장 아쉬운 게 뭔지 알아?


혼자 너무 잘하려고 하는 거야. 모르면 물어보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고, 중간중간 보고하면서 도움도 요청하고 그렇게 같이 하면 되는데 끝까지 혼자서 하려는 게 보여.


야, 너 그러면 오래 못 가. 사람이 실수도 하고 다른 사람들 일하는 방식도 보고, 납득이 안되거나 마음에 안 들어도 대충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안 그래?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냐? 일에서도 관계에서도 사람이 빈틈도 좀 보여주고 또 그걸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해야 더 좋은 거야.


우리 와이프처럼 참다 참다 '나는 이런 스타일이니까 포기하던지 맞추던지 해' 하지 말고, 변할 마음이 없어도 말이라도 '해보겠다'고 하면 좀 좋아? 그럼 나도 서로 노력하자고 했을 테고 말이야. 자존심은 있어서...


암튼!!! 자식이~ 알고 보면 인간미도 있고 그런데 뭔가 벽이 있어. 벽이.

완'벽'말고 이상한 벽이 있다고. 사람이 말이야~ 크크."


***

내면 깊이 늘 부족했던

사랑과 존중을 받기 위해-


일 잘하고 성공하는 거 말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준석이었다.

관계야말로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히 따라올 부분이고 그다지 노력이 필요 없는 부분 같았다.


성철의 말을 들으며 준석은 어쩌면 '관계'야말로 그토록 바라던 '진정한 뭔가'를 느낄 있는 영역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라는 건 어렵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노력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 상처를 받을지라도 마주하고 헤쳐나가며... 그러면서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지는...


지민이 생각났다.

오래전 기숙사에서 지민이 그랬었다.


"자신을 좀 풀어놔봐요. 그래도 선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계속 선배를 좋아할 거예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잠들 즈음

다시 이성을 찾은 준석은 오늘 술자리를 약간 후회했다.


괜히 건드려 견고한 박스가 물러진 건 아닌지...


'그나저나 과장님은 집에 잘 들어가셨으려나? 말은 저렇게 해항상 보면 하루도 못 가 화해하시는 것 같던데...'


(지이잉~~~~)

때 마침 침대 옆 핸드폰에 진동이 울린다.


'양반은 못되시네.

과장님인가?'


...


[선배, 자요?]


지민이다.


반갑다.

반갑지만,

모르겠으니 일단


그냥 자는 척을 하기로 한다.



[똑똑..]


[여보세요?]



...

이렇게 나오면 준석은 도리가 없다.

애써 쌓은 벽이

예기치 않은 적극성에 또다시 무너진다.

 

[아니, 아직ㅋㅋ]


대수롭지 않다는 듯 [ㅋㅋ]를 날린 후

대화창을 응시하던 준석의 눈동자가

핸드폰과 함께 드르르 떨린다.


손에 든 핸드폰에는 발신자

<지민> 이 떠있다.


피할 수 없는 두 번째 공격이다.


(큼큼-급히 목을 가다듬고)

"여보세요?..."


"선배, 아직 안 자서 다행이에요. 좀 전에 동생이랑 만나고 집에 왔는데 어제 선배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요. 잠시 통화 괜찮아요?"


"어? 어. 괜찮지.

무슨 이야기가 생각났는데?"


"선배가 그랬잖아요. 기대치를 높아서, 자신에게 야박하게 굴게 된다고요. 남들에겐 '잘했다 괜찮다' 관대해도, 스스로에겐 '못했다. 더 잘해라. 하나도 안 괜찮다.' 한다고요. 근데 또 누가 뭐라고 지적하면 되게 싫고, 실수나 실패에 약하다고요."


어쩜 신기하게

약점만 저리 조목조목 기억하고 있는지,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섬세히 들어준 마음이 고맙다.


"음... 선배는 뭐든 잘하고 싶어 하고 또 그만큼 잘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늘 긴장돼 보이거든요. 뭐랄까 좀 더 가벼워져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저도 잘 못하지만요. 오늘 동생을 보며 계속 느낀 부분이에요. 제가 동생 이야기 있죠? 어릴 때부터 말썽도 많았는데, 지금은 모범생이던 저보다 훨씬 낫다고요.


동생을 보면 늘 여유로워 보이고 얘가 뭐 이리 가볍지? 싶을 때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확실한 강점이 있더라고요. 깨지고 실수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고 일찌감치 포기하지도 않아요.  특이한 게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똑같이 혼나도 동생은 별로 상처받지 않았어요. 작은 성취에 기뻐하고요. 거창한 미래 계획은 없어도 그냥 그날 그날 해야 할 일 하면서 제 갈길 잘 가요. 뭐랄까 즐겁고 자유로움도 있고 삶의 질이 높은 것처럼 보여요.


물어보니 애초에 기대치가 높지 않아서 그렇대요. 동생이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자기를 받아줘야 한다고요. 불완전함을 인정하래요. 왜, 그... [미움받을 용기]란 책에도 '평범해질 용기'란 말이 나오잖아요."



"흠, 평범해질 용기라.

하긴 돌아보면 늘

'정말 잘해보자!' 하면

거기부터가 문제더라고.

완벽하게 하려는 순간 경직되고

일도 더 안 풀리고,

그러다가 잘못할 것 같으면 도망치고 싶고..."


네! 꼭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완벽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렇게 하면 되는 것 같아요.


저도요. 매일 달성하기 힘든 계획을 세워놓고 공부가 안된다고 시큰둥하고, 남들은 다 제갈길 가는데 백수라고 부끄러워했는데요.


생각해 보니 저도 나름 애쓰고 있더라고요.

오늘은 완벽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칭찬해 주려고요.


그냥... 오빠와 이런 이야길 하고 싶었어요.



***

창문을 바라봤다.


눈이 날아와 쌓인다.


문득 준석은 행복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

사랑스러운 존재가 함께 있다.


통화 저쪽의 지민은

계속해서 종알종알 중이다.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이 결국 나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완벽이라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완벽한 완벽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럼에도 자기 스스로를 더 완벽함을 위해 갈아 넣죠. 지금의 나로서도 충분히 괜찮은데 말이에요."


"지금도 괜찮아?"


준석이 다정하게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지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충분해요.

완벽할 필요 없어요. 오빠,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대요.

저한테는 3킬로 찐 거랑 안 찐 거랑 똑같다고 해주셨으면서

왜 오빠는 저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해요?


전 그냥 노력한다고만 해주면 좋겠어요.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접근하지 마!라고 하지 말고

이런 사람인데 그래도 와줄래. 나 노력할게.라고 말해주면

전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철벽 치지 마시고

좀 열어주시면 안 돼요?


아 진짜 내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냐고요!"



***

눈이 날아와 쌓인다.


그냥 가보기로 한다.

두려워서 관두는 일은 없기로 한다.


겁나도 상처받을지 몰라도

안고 가는 거다.


안는 순간 두려움은 사랑이 된다.

사랑은 포용한다.

어떤 모습이라도 괜찮다.

그래, 괜찮은 거 같다.

이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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