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은 아내와 아들을 끔찍이 아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가족에게 문제가 생길 때 받는 스트레스는 회사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에이, 몰라! 암튼 성격이 너무 달라서...
준석이 너 오늘 약속 있냐?이따 끝나고 가볍게 한 잔 어때? 오늘은 진짜 집에 가기 싫다."
"예, 그러시죠."
어제에 연이은 술자리가 부담이 되었지만 흔쾌히 승낙했다. 한편으론 마음에 남아 걸려있는 지민 때문인지 성철의 제안이 반갑기도 했다.
지민과 갔던 이자카야에 가서,
지민과 앉았던 자리 근처에 앉았다.
'이 정도야 뭐'
상자 안에서는
혼자 어떤 생각을 하든
크게 상처받을 일은 없다.
...
"준석이 넌
딴 건 몰라도 극단적인 여자랑은 만나지 마라. 이혼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술기운이 오른 성철은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고, 얼마나 심하게 싸우셨으면 천사 사모님이 그런 말씀까지 하신 거예요."
준석은 짐짓 놀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다.
"난 있잖아. 아무리 안 맞고 이해가 안 되고 힘들어도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하지 끝장을 보려 하진 않거든. 그러니까 '이혼'이란 단어가 아예 개념에 없다고. 머릿속에 그 단어가 없으니까 최악의 상황 같아도 끌고 가려하고 그러다 보면 좋아지기도 하고 그런단 말이야.
관계라는 게 그런 거잖아. 어떻게 매번 좋냐? 사람도 그래. 어떻게 장점만 있고 다 이해가 되고 그렇겠냐고. 그냥저냥 부족해도 맞춰가면서 사는 게 사람 사는 거지. 안 그래?"
가만히 듣던 준석이 대답했다.
"과장님, 그러고 보면 전 제가 극단적인 거 같은데요? 하하...."
"그래?"
"네, 뭔가 완벽하지 않으면 시작하기도 겁나고요. 부족하다 싶으면 하기 싫어요. 그러니까, 그런대로 그냥 해보는 게 아니라 제대로 못할 거면 하지도 말자는 주의죠. '모 아니면 도'니까 이런 게 극단적인 거 맞죠?"
"그러네~ 크크.. 이 자식 극단적인 놈이네. 하하.
준석! 내가 너 일하는 거 보면서도몇 번 느꼈거든. 일 머리도 있고 센스도 있는데 말이야, 가장 아쉬운 게 뭔지 알아?
혼자 너무 잘하려고 하는 거야. 모르면 물어보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고, 중간중간 보고하면서 도움도 요청하고 그렇게 같이 하면 되는데 끝까지 혼자서 하려는 게 보여.
야, 너 그러면 오래 못 가. 사람이 실수도 하고 다른 사람들 일하는 방식도 보고, 납득이 안되거나 마음에 안 들어도 대충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안 그래?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냐? 일에서도 관계에서도 사람이 빈틈도 좀 보여주고 또 그걸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해야 더 좋은 거야.
우리 와이프처럼 참다 참다 '나는 이런 스타일이니까 포기하던지 맞추던지 해' 하지 말고, 변할 마음이 없어도 말이라도 '해보겠다'고 하면 좀 좋아? 그럼 나도 서로 노력하자고 했을 테고 말이야. 자존심은 있어서...
암튼!!! 자식이~ 알고 보면 인간미도 있고 그런데 뭔가 벽이 있어. 벽이.
완'벽'말고 이상한 벽이 있다고. 사람이 말이야~ 크크."
***
내면 깊이 늘 부족했던
사랑과 존중을 받기 위해-
일 잘하고 성공하는 거 말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준석이었다.
관계야말로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히 따라올 부분이고그다지 노력이 필요 없는 부분 같았다.
성철의 말을 들으며 준석은 어쩌면 '관계'야말로 그토록 바라던 '진정한 뭔가'를 느낄수 있는영역일지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라는 건 어렵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노력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 상처를 받을지라도 마주하고 헤쳐나가며... 그러면서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지는...
'그나저나 과장님은 집에 잘 들어가셨으려나? 말은 저렇게 해도 항상 보면 하루도 못 가화해하시는 것 같던데...'
(지이잉~~~~)
때 마침 침대 옆 핸드폰에 진동이 울린다.
'양반은 못되시네.
과장님인가?'
...
[선배, 자요?]
지민이다.
반갑다.
반갑지만,
모르겠으니 일단
그냥 자는 척을 하기로 한다.
[똑똑..]
[여보세요?]
...
이렇게 나오면 준석은 도리가 없다.
애써 쌓은 벽이
예기치 않은 적극성에 또다시 무너진다.
[아니, 아직ㅋㅋ]
대수롭지 않다는 듯 [ㅋㅋ]를 날린 후
대화창을 응시하던 준석의 눈동자가
핸드폰과 함께 드르르 떨린다.
손에 든 핸드폰에는 발신자
<지민> 이 떠있다.
피할 수 없는 두 번째 공격이다.
(큼큼-급히 목을 가다듬고)
"여보세요?..."
"선배, 아직 안 자서 다행이에요. 좀 전에 동생이랑 만나고 집에 왔는데 어제 선배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요. 잠시 통화 괜찮아요?"
"어? 어. 괜찮지.
무슨 이야기가 생각났는데?"
"선배가 그랬잖아요. 기대치를 높아서, 자신에게 야박하게 굴게 된다고요. 남들에겐 '잘했다 괜찮다' 관대해도, 스스로에겐 '못했다. 더 잘해라. 하나도 안 괜찮다.' 한다고요. 근데 또 누가 뭐라고 지적하면 되게 싫고, 실수나 실패에 약하다고요."
어쩜 신기하게
약점만 저리 조목조목 기억하고 있는지,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섬세히 들어준마음이 고맙다.
"음... 선배는 뭐든 잘하고 싶어 하고 또 그만큼 잘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늘 긴장돼 보이거든요. 뭐랄까 좀 더 가벼워져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저도 잘 못하지만요. 오늘 동생을 보며 계속 느낀 부분이에요. 제가 동생 이야기 한 적 있죠? 어릴 때부터 말썽도 많았는데, 지금은 모범생이던 저보다 훨씬 낫다고요.
동생을 보면 늘 여유로워 보이고 얘가 뭐 이리 가볍지? 싶을 때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확실한 강점이 있더라고요. 깨지고 실수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고 일찌감치 포기하지도 않아요. 특이한 게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똑같이 혼나도 동생은 별로 상처받지 않았어요.작은 성취에 기뻐하고요. 거창한 미래 계획은 없어도 그냥 그날 그날 해야 할 일 하면서 제 갈길 잘 가요. 뭐랄까 즐겁고 자유로움도 있고 삶의 질이 높은 것처럼 보여요.
물어보니 애초에 기대치가 높지 않아서 그렇대요. 동생이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자기를 받아줘야 한다고요. 불완전함을 인정하래요. 왜, 그... [미움받을 용기]란 책에도 '평범해질 용기'란 말이 나오잖아요."
"흠, 평범해질 용기라.
하긴 돌아보면 늘
'정말 잘해보자!' 하면
거기부터가 문제더라고.
완벽하게 하려는 순간 경직되고
일도 더 안 풀리고,
그러다가 잘못할 것 같으면 도망치고 싶고..."
네! 꼭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완벽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렇게 하면 되는 것 같아요.
저도요. 매일 달성하기 힘든 계획을 세워놓고 공부가 안된다고 시큰둥하고, 남들은 다 제갈길 가는데 백수라고 부끄러워했는데요.
생각해 보니 저도 나름 애쓰고 있더라고요.
오늘은 완벽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칭찬해 주려고요.
그냥... 오빠와 이런 이야길 하고 싶었어요.
***
창문을 바라봤다.
눈이 날아와 쌓인다.
문득 준석은 행복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
사랑스러운 존재가 함께 있다.
통화 저쪽의 지민은
계속해서 종알종알 중이다.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이 결국 나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완벽이라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완벽한 완벽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럼에도 자기 스스로를 더 완벽함을 위해 갈아 넣죠. 지금의 나로서도 충분히 괜찮은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