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내가 평택의 한 초등학교로 향한 것은 인사이동과 학년 배치로 모든 초등교사가 바쁘게 움직이는 2월이었다. 내 기억 속의 평택이라는 곳은 저층 건물이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는 경기도 외곽지역이었다. 그러나 그 기억은 10여 년도 더 지난 낡은 것이었고, 다시 찾아온 평택은 내가 알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뉴스에서 들었던 삼성 공장이 들어서서였을까?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했다. 넓게 펼쳐진 평야는 신도시가 들어서기에 천혜의 조건이었다. 내가 찾아간 곳, 나의 새 발령지는 그런 아파트들로 둘러싸여 있는 제법 큰 초등학교였다.
경기도 서남부의 평택으로 발령을 받기 전까지, 나는 이천과 용인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직전 근무지인 용인에서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보내고 다시 근무지역이 바뀌게 되었다. 2023년 겨울, 수석교사 채용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게 되면서 새로운 교사자격증과 초등학교 수석교사라는 새로운 직위를 갖고 새로운 근무지에서 일하게 되었다. 한 달 정도 되는 짧은 직무연수를 받은 얼마 되지 않아 발령지와 근무학교가 발표되었고, 곧바로 새 학교에 인사를 갔다.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나는 처음 교무실을 들어섰을 때 교무실 식구들의 반응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다.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와버렸다는 듯하게 날 보던 그 눈빛들을 잊기가 쉽지는 않으니까. 교무실을 지키고 계시던 두 분의 교감선생님은 여러 모로 당황하신 듯하였다. 수석교사가 배정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을 것이며, 생각보다 많이 어린(?) 수석교사라서 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원하지 않은 수석교사가 왔는데, 수석이라 대우는 어느 정도 해줘야 하겠고... 근데 경력도 당신들보다 많이 짧아서 10년 정도 후배이니 수석 노릇을 잘할지 걱정도 되었을 것이다.
만나보지 않았지만, 평교사인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그와 결이 다른 불만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그것은 수석교사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수석교사를 어떻게 생각할까? 수석교사는 학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교사들에게 관리자가 아니지만 장학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교감처럼 승진한 사람은 아닌데 자꾸 본인들과 다른 대우를 요구하는 '꼰대'로 인식되지 않는가? 대다수의 수석교사는 수업은 적게 하면서 별도의 공간을 제공받는 등 평교사보다 나은 예우(?)를 받는다. 수석교사들이 교감처럼 바쁘지도 않으면서 교감 대우를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의 인식이었다. 종합하자면, 학교의 절대다수인 평교사들은 그런 수석교사의 삶이 특혜로 점철되어 있다고 보는 듯하다.
나의 적응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수석교사에 대한 학교구성원들의 인식이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생존을 위해 정보가 필요했다. 2월 동안 얻은 몇 가지 정보는 새 학교에서의 생활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불편한 예측으로 이어졌다. 내 발령을 걱정해 준 여러 선생님이 조사한 공통된 정보에 의하면 내가 근무하게 된 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서 평택에서 악명 높기로 1위를 놓치지 않은 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선생님들을 통해 확인한 것은, 원래 교장선생님께서 학교의 특색을 만들기 위해 초빙하려는 수석교사가 따로 있었는데 피치 못한 사정으로 이 학교에 발령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은 교장선생님의 엄격한 수업 장학-원로교사도 예외 없이 40분을 모두 참관하는 동료장학-으로 선생님들의 불만이 매우 크다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는 수석교사를 부르지 못했고, 두 분의 교감선생님은 수석교사와 교감으로서 근무해 보지 않았고, 선생님들은 장학이라면 진저리가 나 있는 상황에서, 나는 장학을 주 업무로 삼아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이다. 게다가 나는 수석교사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관리자나 선생님들과 어떻게 관계 정립을 할지 뚜렷이 알지 못하는지라,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객관적으로도, 나는 수석교사와 근무를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데다, 군경력과 기간제 경력을 빼면 수석교사 채용 응시 최소 경력인 15년 밖에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노련하게 새 일을 시작할 것이라는 낙관을 품을 수 없었다.
신규교사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채 새 학교에서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근거지인 이천을 떠나 용인에 들어섰을 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검증할 이유가 없었다. 지역을 옮기고 나서 한 것이 끽해야 학년부장, 연구부장이라 동료교사들과 직위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택에서는 달랐다. 수석교사가 되면서 더 이상 동료교사들과 같은 직위가 아니었고, 관리직 경로인 교감과는 다른 교수직 경로에 있어서 관계가 애매했다. 만약 수석교사로서의 시작이 이천에서였다면, 내 과거를 잘 알고 있는 수많은 선후배들의 기억을 통해 순탄하게 새 직위를 시작하였을 텐데... 그러나 이런 가정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곳의 누구도 내가 교사로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 못하기에, 실력으로서 보여줄 수 없다면 자리 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실력을 보여주어야 할 대상은 학교장과 교감, 평교사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낯선 수석교사이지만, 나 역시 수석교사인 내가 낯설었다. 신규교사의 첫 1년 적응을 생존을 위한 발버둥으로 묘사하곤 한다. 나의 신규 수석교사로서 생존하기 위한 노력은 아마도 좌충우돌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낯설고 불편한 상황을 잘 헤쳐나갈 것으로 기대했다.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