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첫 주, 학교에서의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다행히도 수업이 없었다. 교사가 수업이 없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비난받을 여지가 있지만, 수석교사로서 첫 해를 시작하는 교사에겐 그 한 주가 정말 간절할 수도 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업무를 개시하기엔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첫째, 나는 평택이라는 지역의 풍토나 학교의 분위기를 전혀 몰랐다. 둘째, 수석교사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권한이 있는지 몰랐다. 셋째, 수석교사로서 관리자나 교사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로 업무를 밀어붙일 수 있는 지도 몰랐다. 나는 이런 무지 속에서 장학이라는 고유사무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계획을 가지지 못한 채 새 학년도를 맞이했다. 그래서 수업이 없는 한 주의 여유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교직 경력이 거의 20여 년에 가까운 내가 장학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장학의 범위가 다양하지만, 많은 교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동료 장학, 즉 수업 장학이다. 일반적으로 동료 장학은 학교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고 교육의 질에 대해 피드백을 받음으로써 교사의 교육 역량을 기르는 제도로 여겨진다. 그러나 많은 학교에서는 동료들의 참관 없이 교장이나 교감이 잠시 들러서 10분 정도 학급 분위기를 관찰하고 넘어가기 일쑤고, 심한 경우 참관자가 아예 없게 조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소극적인 동료 장학은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길 꺼리는 교사들의 경향과 교사들이 원치 않는 수업 장학에 굳이 자기 시간을 들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관리자 양쪽의 이해관계에 맞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상호호혜적 현상은 주로 '교사-관리자 간의 신뢰'로 포장된다. 선생님들을 믿으니 장학 당일에 참관을 안 가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장학이라는 것의 강제력이나 범위가 지역이나 학교 풍토에 따라 고무줄 늘어나듯 달라지는 것이었다. 많은 학교가 동료 장학을 운영하는 데 있어 교감의 약식 장학을 방불케 하는 수준으로 대강 하고 넘어가지만, 나의 직전 근무지에서는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이 각각 20분씩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눠 참관을 하였다. 그리고 수석으로 근무하게 된 이곳은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 두 분이 40분을 꼬박 참관하는 데다가, 원로교사들 마저도 수업을 공개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년을 앞둔 원로교사에게는 자기 장학이라는 이름으로 수업 공개를 면하는 것이 관례처럼 여겨지는데, 우리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그런 예외를 두지 않고 있었다. 교사는 수업 전문성으로 자신을 말하며, 교사가 전문가라면 수업을 언제든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교장선생님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우리 교장선생님의 악명은 이런 꼬장꼬장한 장학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겪는 곤란은 다른 게 아니라 이런 분위기에서 장학을 어떻게 풀어갈지 답을 찾을 수 없어서였다. 장학은 수석교사의 본연의 업무이자 권한이지만, 나는 두 가지 분명한 조건을 떠올려야 했다.
첫째, 학교장 역시 교사들을 평가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장학에 참여해야 한다.
둘째, 학교장은 학교의 최종 결정권자이며, 수석교사의 사무 역시 학교장의 통할 범위 내에 있다.
장학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이곳의 분위기 속에서 내가 이 학교에서 생존하는 방법은 선생님들의 장학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석교사가 교장선생님의 의지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의중을 확실히 살피기 위해 대화를 나누었다. 교장 선생님은 지도안과 수업 자료를 다운로드해서 사용하는 수동적인 분위기를 혁파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공부하듯 선생님들도 서로 소통하며 전문성을 기르길 바랐고, 그 방법이 수업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교사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훌륭한 비전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동안 확인하기로는 선생님 중 다수는 이러한 비전에 동의하지 않거나 원로교사들에게까지 수업을 공개하게 하는 것이 모질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장학 자체에 대해 완강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나는 장학 문제에 대해 교장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장학 대상이나 장학 방법을 바꿀 수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지도안 서식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지도안 양식에 선생님들의 일상적인 수업을 담고, 그 안에 학급 운영과 수업에 대한 고민을 정리해보게 함으로써 선생님들의 전문성과 책임감을 수업 참관자(실은 교장선생님)에게 보여준다면 지금의 갈등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일상적 수업을 지도안에 넣으라는 것에 대한 교사들의 걱정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많은 선생님이 인디스쿨과 같은 커뮤니티에서 받은 자료로 동료 장학을 준비한다. 그 이유는 보여주기 좋은 특별한 수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의 결과는 누군가에게 교육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학교장은 관리자로써 동료장학을 12년 이상 했을 텐데, 그동안 made in 인디스쿨의 수업을 얼마나 많이 보았을까? 똑같은 출처의 수업을 족히 십수 회 봤으리라 생각한다. 예의 상 준비한 보여주기 수업으로 인해 열정 없는 교사로 오해되는 것이다. 내가 지도안 양식에 집착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고, 어떻게든 관리자-교사 사이의 오해를 풀어야 했다.
어떤 구성으로 기본 서식을 만들까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또 고민도 해봤다. 그리고 지도안 기본 틀을 만들고 예시 지도안을 만들었다. 어떤 내용으로 동료 장학 지도안을 작성할지 구체적인 예가 있어야 선생님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교무실의 두 교감선생님들께 함께 살펴봐주십사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나에겐 경험 많은 선배들의 안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의견을 나누고 수정한 것을 토대로 교장실에 들어갔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나의 시도를 미심쩍어하는 듯하였지만, 일단 믿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동료장학을 포함한 학교 장학 계획을 상신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승인의 문제였다. 나는 이곳 학교 조직의 일원이고, 교장선생님의 통솔 범위에 있기 때문에, 나의 아이디어는 학교장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었다. 기획에 대한 학교장의 결재가 완료되어서 나는 그것으로 고민이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일을 겪었다. 동료 장학을 하기 위한 사전협의회 자리에서 들은 몇 마디 때문이다.
누구 마음대로 바꾸셨어요?
행정적인 지휘 권한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내가 나이가 어려서였는지. 기존에 근무하던 선생님도 아닌 새로 전입온 경력 교사 입에서 나온 이야기라서 더 황당했지만, 나는 차분히 이런 변화가 있게 된 전후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설명 후에 내게 돌아온 말은 더 압권이었다.
참 안타깝네요.
명백히 나와 두 분의 교감선생님,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문제의식과 접근 방식을 평가하는 듯한 말이었다. 교수직인 수석교사나 관리직인 교감과 교장이 평교사와 비슷한 경험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 마치 안타깝다는 그 짧은 말은 넷의 교직 경험을 아득히 초월한 우월감에서 나온 것 것처럼 들렸다. 탈권위 시대라고 하지만 직급에 따른 권위를 깡그리 무시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는 업무담당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수석교사의 업무는 학교장에게 승인되어야 하지만, 다른 교사들에게는 허락을 구할 것이 아니다. 수석교사의 임용은 승진의 개념은 아니지만 교사의 경로에 있어서 명백히 교수직 최종단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석교사의 결정은 동료들에게 그냥 이해를 구할 뿐, 허락받을 것이 아니다. 예의 차린답시고 무례한 말에 입조심하던 그때의 선택이 아쉽다.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