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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현 Oct 16. 2024

가운과 핫 초콜릿

 서머타임이 끝나간다. 그것은 곧 엄청난 추위가 내 살을 파고든다는 것이다.


 내 방에 있는 라디에이터는 진짜 웃기는 물건이었다. 그는 물건의 품격은 중요시하고 인간의 품격은 신경 쓰지 않았다. 라디에이터에 걸어둔 양말은 순식간에 바짝바짝 말랐지만, 내 이는 아작아작 부서질지도 모를 정도로 부딪쳤다. 이미 이 도시의 추위를 한 번 경험한 사람으로서 위풍당당하게 온풍기를 구입했다. 한국 친구들은 그런 나를 말렸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갈 텐데 그거 잠깐밖에 못 쓰잖아. 그냥 좀 참아. 

 참을 수 없었다. 기숙사에 살고, 레지던스에서 지내니까 모르겠지만 제 방 지이이인짜 춥거든요? 내 방은 원래 이 집에서 창고로 쓰던 곳이었다. 한마디로 물건을 위한 방이지, 사람을 위한 방이 애초에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막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키고 한 손에 온풍기를 들고 집으로 입장했다. 때마침 린은 밖으로 나가려다가 나를 마주치고는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한 번 스윽 봤다. 눈치가 있었더라면 온풍기를 잽싸게 옷장 안이나 책상 아래에 숨기고는 모른 척했어야 했다.

 그날 밤 온풍기의 위력을 시험하겠다며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고 솔솔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두 손을 맡겼다. 온몸이 녹아내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엄청난 먼지가 있는 러그 바닥에 철퍼덕 앉아 사랑스러운 온풍기를 마주 보았다. 그때 린이 문을 두드렸다. 

 온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나? 발소리도 조심스럽게 내는데 이건 조금 억울했다. 문을 열자 린이 두 손을 비비며 서 있었다. 린은 내 방에 있는 작고 귀여운 온풍기를 보더니 말했다. 샤, 그거 쓰지 말아 줘. 부탁할게. 전기세가 많이 나오거든.

 당황스러웠다. 못 알아들은 척하고 그냥 써버릴까 했지만, 그럴 배짱은 없었다.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콘센트에서 플러그를 빼 갑자기 아무 의미가 없어진 온풍기는 그대로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끙’하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말이야, 내가 말이야, 설거지도 하고 손주도 봐주고 말이야.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얘기도 안 하고 있고 말이야. 혹시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이웃 눈치도 봐주고 있고 말이야. 야속했다. 집 없는 자의 서러움이 차가운 방 공기에 얼음이 되어 심장에 콕콕 박혔다.    


 서머타임이 끝났다. 그것은 한 여름의 파티도 막을 내린다는 것이다.  


 한동안 지독한 방랑벽에 걸렸다. 언제나 정류장에서 내려 작은 공터를 지나 주택 단지 내 세 번째 집으로 쏙 들어가던 나는, 그 여름, 집을 감싸는 적막이 이상하고 무서웠다. 딘은 학교에서 혼자 돌아와 자전거만 놓고 바로 나갔고, 린은 더욱 바빠졌는지 집에 없는 시간이 많았다.   

 낮은 너무나 길었다. 가방을 놓고 집 밖으로 나왔다. 떠날 곳도 없으면서 기차역으로 무작정 갔다. 거기서는 런던도, 브라이튼도 언제든 갈 수 있었다. 개찰구 밖에서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다가 역 안에 위치한 카페에 앉았다. 퇴근 시간 전까지는 조용했기에 음료를 가만히 응시하기도, 흰 벽에 걸린 알 수 없는 그림들도 뚫어지게 바라봤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변할락 말락 하면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가방을 놓고 오지도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오래된 항구도 거닐고 그들의 기숙사 방에도 놀러 갔다. 그러다가 기숙사 라운지에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아주 작은 뭉치가 거대한 덩어리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파티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생일 파티, 환영 파티, 작별 파티 등 온갖 주제와 이름을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환한 밤을 보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거대 덩어리는 작은 실마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법.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멀리 떨어져 앉아 어느새 커버린 집단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떤 터키인에게서는 처음 보는 미소를 발견했고, 어떤 일본인의 격정적인 춤사위를 목격하기도 했으며, 어떤 스페인 사람의 쉴 새 없는 수다를 지켜보기도 했다.

 자리를 떴다. 그럴 때마다 취한 무리가 ‘허엉-’이라며 거짓된 배려로 인사를 하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아쉬움을 표현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로 나오면 낮에는 볼 수 없던 민트색 박스가 등장한다. 술 취한 도시를 위한 간이 화장실이었다. 이 도시는 마치 연극을 위한 무대 같았다.

 열쇠를 꺼내 조심스럽게 열쇠 구멍에 넣고 돌렸다. 린의 방문 틈으로 불빛이 흘러나왔다.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거실에서 그녀가 나를 불렀다. 에구구, 또 무슨 핀잔을 들으려나. 

 쭈뼛거리며 소파 옆으로 다가가자 린이 밝게 웃으며 잘 접힌 목욕 가운과 양말을 건넸다. 

 “샤, 우리는 겨울에 이걸 입고 있어. 엄청 따뜻해.”


 일단 받아 들고 올라왔다. 하얀 수건이 무슨 보온 기능을 할까 싶어 갸우뚱했다. 침대에서도 입던 패딩을 벗고 목욕 가운을 입었다. 건네준 양말도 신었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샤- 잠깐 들어가도 될까?”

 목욕 가운을 받아 들자마자 홀랑 입고 있다는 사실이 민망했지만, 문을 열었다. 린은 컵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김이 펄펄 나는 컵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있잖아, 우리는 추우니까 달달한 걸 마셔서 열을 내야 해. 린은 팔자 주름을 보이며 깊게 웃었다. 내 팔을 문질러주고 방을 나갔다.

 그녀가 건넨 건 마시멜로가 퐁당 들어있는 핫 초콜릿이었다.


 서머타임이 끝났다. 그것은 한국에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상황만 지켜보다 끝내 이별의 '이'자도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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