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안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벽은 짙은 갈색 나무였고 조명도 제대로 없었다. 모든 것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의존해야 했다. 뮌헨을 떠나서 얼마 동안은 조용하고 깨끗한 풍경이 이어졌지만,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도시에 가까워지자, 방음벽과 건물들이 드문드문 등장했다.
“다시 깜깜해졌네요.”
“맞아요. 도시가 자꾸 커지니까요.”
에이미와 나는 말없이 창문 밖을 응시했다. 한 번 팽창한 도시는 작아질 수가 없었다. 자신이 원하던 세상이 아니라던 주원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이번에도 먼저 알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가방을 메고 특유의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사무실을 걸어 나가는 그를 떠올렸다. 웃음이 나왔다. 그가 옆에 있다면 알려주고 싶었다. 있지, 모든 게 자라기 위해 기를 쓰는 세상에도 아직 이런 기차가 달리더라, 주원아. 그게 너무 처량한데, 또 너무 웃겨. 나는 쓸쓸한 것에는 왜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 날까.
“사실 나는 당신을 알아요. 당신의 영화를 봤거든요. 근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네요. 미안해요.”
에이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 아닌가요?”
“아니요. 맞아요. 너무 놀라서요.”
그는 핸드폰으로 검색하더니 포스터를 보여줬다. ‘앨린’이라는 영화였다.
“그 사람이 이 영화를 좋아했어요.”
주원은 영화를 좋아했다. 나는 영화를 잘 알지 못했고, 취향도 기준도 없었던 터라 그가 고르면 따라갔다. 대부분은 거의 졸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에 왜인지 모를 우월감을 느꼈다.
이 영화를 본 날도 주원은 나의 감상평을 물었다. 주원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듣거나 스치듯 보았던 것들로 말을 꾸며냈다.
“슬펐어.”
“슬펐다고? 왜?”
모른다. 감독이 어디에서 슬픔을 느끼게 하는 장치를 썼는지, 그 장면에서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어떤 화면 기법을 썼는지 모른다. 사실 놀랍고 무서운 마음이었는데 슬프다는 말이 나와버렸다.
“음. 아이의 눈동자가 슬프잖아.”
당황해서 그것도 모르냐는 식의 말투가 되어버렸다. 대답을 끝내고 주원을 쳐다봤을 때, 그의 왜소한 체격이 더 작아졌다. 나는 어찌할 줄 몰라 멀리 떨어져 지켜보기만 했다. 이후에도 그는 몇 번을 혼자 보러 갔고, 자기도 이제 눈동자의 슬픔을 느낄 수 있다며 자랑처럼 말했었다.
“이 영화가 내가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였어요.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르죠. 저는 어린아이들을 담당하는 선생님인데,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이 자기가 연출하는 영화에 출연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거든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네요.”
신기한 일이긴 했다. 그들이 동아시아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눈에도 그들은 모두 도플갱어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의 얼굴을 정확히 알아보았다.
“당신 얼굴이 이렇게 크게 나와서 기억해요.”
“앨린이 연극 수업을 하는 나를 봤을 때 그렇게 놀랐다고 하더라구요. 당신도 영화에 대해 알겠지만, 어렸을 때 가정에서 학대와 폭력을 당하면 한 가지의 표정만 보고 자라니까요. 주인공 아이도 우리 학교 학생이었는데 앨린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었어요. 기뻐도 웃지 않고, 놀라도 놀란 표정을 짓지 않잖아요. 자신의 고통을 말할 정도로 앨린이 컸다는 게 대단한 일이에요. 그 아이에게 꼭 전해줘야겠어요. 한국의 관객을 만났다고.”
나는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잘츠부르크. 다음 역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