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마음에 걸리는 세 가지

아홉 번째 만남, 아니 첫 데이트

by 뿌리와 날개

밤새 생각이 많아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얼마 자지 못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몇 시간 뒤면 그를 만나 우리의 관계를 매듭지어야 했으니까.



서둘러 친구와 아이 둘을 위한 도시락을 쌌다. 샤워를 하고 음식을 만들면 몸에 음식 냄새가 밸까 봐 아이가 출발하고 나면 씻으려고 했다.



10시에 친구가 오면 샤워를 하고, 10시 반까지 우리가 처음 마주쳤던 그 마트에서 그와 만나기로.



그런데 준비를 다 마치고 약속 시간이 다되어가는데도 친구가 오지를 않았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친구인데 연락도 없이 늦어서 슬슬 당황하기 시작했다.



10시 반에 만나기로 했는데 10시 5분이 넘어가는 지금 나는 아직도 초췌한 몰골이다. 그와의 약속 시간을 좀 더 넉넉하게 잡을 걸 3시간 여유밖에 없어서 너무 욕심을 부렸나 보다.



친구가 언제 도착할지 모르기 때문에 샤워하러 들어갈 수가 없었다. 천생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씻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친구가 도착했다.



“나 10시 45분은 되어야 도착할 것 같아. 친구가 10시에 오기로 했는데 늦어서 이제야 도착했거든. 나 아직 샤워 전이야….”


“괜찮아!”








아이를 보내고 서둘러 샤워를 했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편인데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이렇게 늦어서 그가 나를 지각쟁이라고 생각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단 둘이서 대낮에, 그것도 밖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라 좀 꾸미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도 많이 촉박했고, 또 나는 평소에 화장을 거의 안 하고 살아서 괜히 시간도 없는데 건드렸다가는 짝짝이 눈썹을 하고 나가게 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또 맨 얼굴로 문을 나섰다.



아홉 번을 만나도록 나는 얼굴에 그 흔한 분칠 한 번을 못하는구나!

아, 애 데리고 연애하기 힘들다!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 42분. 집에서 마트까지는 450미터.



뛰기로 했다.



방금 감고 시간이 없어 드라이도 제대로 못한 채 헝클어진 머리에 빗질만 대충 하고 나오느라 뛰면 머리카락이 다시 엉킬 게 분명했지만, 약속 시간에 늦는 것보다는 낫다.



해는 뜨겁고, 마음은 급하고, 숨은 턱까지 차서 헐떡 거리며 그가 어디 있나 두리번거리며 마트 주차장 입구에 들어서려는 그때,



주차장과 인도 사이를 가르는 낮은 담에 앉아있던 그가 와다다다다- 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으아아아아악!!!!!!!!!!!”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깜짝 놀라서 뒤로 자빠지며 목청이 떨어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하하하하하하! 많이 놀랐어? 미안해! 네가 너무 급하게 뛰어오길래 내가 마중 나왔지!”



휘청거리는 나를 부축하며 그는 웃었지만, 나는 조금 전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른 것 같아 굉장히 창피했다. 그건 그렇고, 그가 원래부터 이렇게 개구진 사람이었나?



날이 너무 더워서 그가 당연히 시원한 마트 안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마트 입구까지만 뛰고, 들어가기 전에 옷매무새도 좀 다듬고, 머리도 정리하고, 숨도 좀 고르고 하려고 했는데 다 틀어져버렸다.



그가 어디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왔을 내 모습이 미친년 산발한 것 마냥 많이 추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장을 보고 난 뒤, 늘 들고 다니는 천가방 두 개에 짐을 나눠 담았다. 그는 무거운 것들을 모아 한쪽 가방에 담아서는 자기 어깨에 멨다.



집에 도착하자 그가 냉장고 문을 열고 장 봐온 물건 정리하는 것을 도와줬다.



시간을 보니 대략 1시간 반 정도 남은 것 같다.



“이제 뭐할까?”


“뭐하고 싶은데? 네가 하고 싶은 거 하자.”


“음…. 그럼 아이스커피 마시러 시내 나갈까? 록다운 있고 난 뒤로 나 한 번도 시내에 안 나갔거든. 사람 구경도 좀 하고 싶고, 걷고 싶어.”


“시내까지 걸어갈까, 그럼?”


“응! 좋아!”



그렇게 우리는 시내까지 2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은 맑고, 날씨도 화창했으며, 정말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는 길이라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런 날 나와 함께 걸어주는 멋진 남자가 있다는 것도 근사한 일이었다.








시내 초입에 테이크아웃이 가능한 카페가 있었다. 아이스커피 두 잔을 시키고 돈을 내려는데 그가 한사코 돈 내려는 나를 말렸다.



“아냐. 쉬는 날 나와서 나 장보는 것도 도와줬잖아. 내가 살게.”


“괜찮아. 오늘은 내가 사는 거야.”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쯤은 터득할 만큼 나이를 먹었다. 특히 남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나는 어지간해서는 함부로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공짜 대접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에게 커피를 얻어먹기로 했다.








커피를 들고 나오니 뭔가 기분이 좀 이상했다. 미처 기분이 왜 이상한지 깨닫기도 전에, 그가 내 표정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우리 저쪽에 가서 앉을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지금 오래 걸어 다리가 슬슬 아파오고, 그래서 어딘가 앉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걸 알았다.



그는 정말,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보다 더 빨리 내 감정을 캐치해내는 그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와, 너 정말 신기하다. 내가 앉고 싶어 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내가 그렇게 읽기 쉬운 사람이야?”


“네가 읽기 쉽다기보다는 내가 그런 능력이 남보다 상당히 뛰어난 편이야. 넌 Authentisch(아우텐티쉬) 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유난히 잘 읽는 섬세한 남자와 마음 상태가 유난히 얼굴에 잘 드러나는 솔직한 여자라…….








가까운 벤치에 앉아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슬슬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꽤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조심스럽게 “Interesse für mich”라는 말을 꺼내자 그 역시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렇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직접 들으니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말을 꺼내기는 했는데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다음 문장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젠장….



아무 말이나 그냥 떠오르는 대로 뱉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가 하나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럼. 아주 똘똘하고 멋진 녀석이지.”


“예전에 네가 그랬었잖아. 남의 아이를 키우는 여자와 연애하는 건 쉽지 않다고.”


“그랬지. 우리 아빠도 엄마랑 이혼하시고서 딸 하나 있는 분이랑 재혼하셨거든. 내 삼촌도 지금 아이가 둘 있는 싱글맘이랑 연애 중이고. 그래서 잘 알고 있지.”


“아…. 그래?”


“응.”



그래서 그런 말을 했었구나, 자기가 재혼가정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아빠랑 재혼하신 분의 아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거야?”


“아니. 아빠가 재혼하셨을 때는 나나 동생이나 이미 성인이었기 때문에 동생이 생긴 걸로 힘들지는 않았어. 그때 그 아이가 지금의 빈이 나이랑 같았는데,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귀여운 꼬마였지.


지금은 벌써 16살이나 먹어서 아가씨 티가 제법 나. 내 친동생과 다름없이 똑같이 사랑하는 막냇동생이고.”


“아…. 그랬구나. 넌 아이는 없고?”


“나? 내가 아는 한은 없는 걸로 알고 있어.”



워낙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여자가 원하면 아이를 낳는 나라라, 데이트할 때 상대방에게 아이가 있냐고 물어보는 것은 거의 기본이다. 그런데 독일 남자들의 대답이 재미있다.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꼭 “내가 아는 한,”이라고 조건을 넣거나, “없길 바래야지.”하고 소원의 형태로 대답을 한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여자가 자식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는 한, 남자는 현대의학의 도움 없이는 생물학적으로 자기 자식을 절대 확인할 수 없으니.



게다가 남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이를 낳거나,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고 헤어진 뒤 몇 년 뒤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는 여자들도 드물지 않다.



논리적 빈틈없이 대답하는 방식을 보니, 그도 역시 어쩔 수 없는 독일 남자였다. 훗.



“내가 아이가 있다는 게 어떤 뜻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


“알고 있지. 충분히 생각해봤어. 난 빈이가 마음에 들어. 나랑 비슷한 구석도 많고, 잘 맞는 것 같아.”


“아이 있는 여자랑 데이트해 본 적 있어?”


“아니. 네가 처음이야.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나쁘지 않아. 그리고 우리 삼촌도 싱글맘이랑 연애 중인데 엄청 행복하대. 나랑 제일 친한 친구 놈도 얼마 전에 연애를 시작했는데 그 녀석 여자 친구도 딸이 하나 있다고 하더라. 5살이래.”


“아…. 그래? 거 참 신기하네. 네가 많은 나이도 아닌데 주변에 싱글맘 만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있는 걸 보면….”


“적은 나이도 아니지. 이 정도 되면 슬슬 아이 있는 사람도 만나게 돼. 자연스러운 거야.”



대화가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서 좀 얼떨떨했다. 쿨한 성격인 건 알고 있었지만, 대답이 정말 시원시원했다.







언젠가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됐는데, 그게 만약 한국 남자라면 어떨까 생각했을 때 항상 머릿속에 떠오르던 그림이 있다.



그의 부모님이 기껏 유학 보내 놨더니 결국 만나는 게 애 딸린 이혼녀냐면서 나와 아이를 결사반대하는 그런 장면.



꼭 그게 아니더라도 괜히 그와 그의 가족들 앞에서 아이를 데리고 서 있는 내가 왠지 모르게 죄인이 된 듯 작아지고, 아이는 그런 내 모습에 눈치만 보고 있는 그런 모습.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2019년의 한국은 여전히 미혼모가 총각과 사랑에 빠지는 플롯(동백꽃 필 무렵/KBS2)으로 20부작이나 되는 드라마 서사가 가능한 나라이지 않나.



실제라고 다르지 않다. 커리어 괜찮은, 젊고 예쁜 탤런트가 단지 이혼 경험과 아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미혼인 남자 친구와 그의 가족들 앞에서 눈물짓고, 죄책감으로 고개를 떨구며, 가녀린 그녀를 안아주는 남자 친구와 그의 가족들이 대인배처럼 그려지니까.


물론 그녀의 예비 시부모님은 좋으신 분들 같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그녀가 여기 독일에 사는 싱글맘들처럼, “내가 아이가 있는 게 뭐가 어때서?” 하는 마인드로 당당하게 방글방글 웃고 나왔다면, 그래도 시청자들이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행복을 빌어줬을까?



몸이 좀 고달프더라도 내 자식 내가 옆에 끼고 당당하게 살고 싶다. 혼자 사는 한이 있더라도 비굴하게 아이와 숨죽이고 살고 싶지 않다. 맘껏 울고, 맘껏 웃고, 그렇게 아이와 내가 타고난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



“너희 부모님이 아시면 뭐라고 그럴까?”


“좋아하시겠지?”


“응?”


“내가 그렇게 원하던 진짜 멋진 여자를 드디어 만났으니까!”



와, 이 남자는 정말 후진이 없구나!








“내가 무신론자라는 것도 생각해본 거지…?”


“응. 네가 너를 무신론자라고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지.”



그는 말을 참 영리하게 잘한다. 그를 만나고 난 뒤 그와의 끊임없는 문답을 통해서 나는 내가 Atheist(아테이스트/ 무신론자)보다는 Agnostiker(아그노스티커/ 불가지론자)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Agnostiker : 뭔가 초월적인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것이 신일수도 있겠다고 짐작은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하거나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



“물론,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와의 대화를 통해서 내가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졌으니까. 그래도 너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고, 나는 그런 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이 많은 사람인데 우리가 과연 어울릴 수 있을까?”


“내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너 역시 내가 믿는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어. 믿음은 그렇게 강요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나는 네가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너와 내가 만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그런 큰 뜻 안에서 이뤄진 것이고.


언젠가 너도 그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면 너의 삶이 더 아름다워지는 거니까 그런 때가 온다면, 너를 위해 기뻐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너와 하나님 둘의 문제이지 내가 그 사이에 개입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그런 걸로 네가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면서 그는 종교와 관련한 마음 아픈 가족사를 나에게 털어놓았다.



그의 내면이 그토록 성숙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럴만한 배경이 있었다.








“쉽지 않은 이야기였을텐데, 이렇게 나를 믿고 솔직하게 털어놔줘서 고마워. 원래도 네가 강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너 정말 다시 보인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시련을 겪게 마련이지. 아무 아픔 없는 삶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나와 우리 가족들은 그런 시간들을 통해서 주님께 가는 길을 찾았고, 지금은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너도 좋아할 거야, 우리 가족들.”



시기와 형태만 조금 달랐을 뿐, 그도 나처럼 인생의 길을 잃고 크게 헤맨 적이 있었다.



나처럼 가정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봤고, 무너지는 가족의 손을 잡고 힘든 시기를 버텨낸 적이 있으며, 가족과 반목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쳐 그들을 보듬고 어린 시절의 자신을 달래는 과정도 겪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털어놓는 모습에서 그가 나를 생각보다 훨씬 더 신뢰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또 자신이 호감을 얻고 싶은 상대 앞에서 자신의 약한 부분을 감히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보며 그가 얼마나 내면이 단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생채기 좀 났다고 평생 마음속에 감옥을 만들어 자신을 가두고 학대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런 혹독한 시간을 겪고도 그 시간들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자신이 겪은 시련을 오히려 성장의 거름으로 삼아 삶을 기름지게 가꾸고 그 밭에서 수확한 열매를 다시 주변에 나눠주는 그 사람은, 영락없이 나와 닮아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우리는 다시 집으로 향해야 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했다.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도 아까 나와 나눈 이야기를 곱씹어 보는 듯했다.



그와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마음에 걸리는 게 세 가지 있었다. 내가 아이가 있다는 점,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가 나의 대학 동기라는 점.



앞선 두 가지는 대화를 통해 서로의 솔직한 입장을 들어보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걸림돌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간간히 나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이 선을 넘기 전에 친절하게 먼저 선을 그어줬다.



“미안한데, 나는 대학 동기랑은 데이트하지 않아.”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말은 정말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서 이 말 한마디면 남자들은 바로 도망갔고, 다시는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에도 그런 남학생이 하나 있었다. 마흔이 넘은 그 친구는 나의 밝고 사교성 있는 모습에 접근하기도 쉬울 거라 생각했는지 금세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 놓고 내가 동기와 데이트하지 않는다고 하자, “어이쿠, 그럼 안 되겠네. 이거, 대학이라도 관둬야 하나.” 하며 바로 꽁무니를 빼고 도망갔다.



나는 그때 그 남학생이 사정없이 꼬리를 내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다.



찻길을 건너며 말을 던졌다.



“그런데 나는 대학 동기랑은 데이트하지 않아. 내가 남자를 만날 때 지키는 룰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가소롭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서? 그건 네가 멋대로 만든 룰이지, 내가 만든 룰은 아니잖아?


난 동의한 적 없으니까 그럼 이제 네가 그 룰을 부숴버려야 할 차례겠네.”




헉!!!!

뭐야, 이거.

제대로 반골이네!!!!




‘Sollen’ 동사였다. 영어로 치면 Should. 명령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강한 어조의 성격을 띤 충고나, 조언을 할 때 쓰는 말이다. 그는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Sollen’이라는 동사를 썼다.



상상도 못 한 대답인 데다 말하는 게 어찌나 카리스마 넘치는지,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따위 룰은 부숴버리라는 그의 말이 내 가슴을 뚫고 들어와 그와 나 사이에 있던 단단한 담에 쾅 부딪혔고, 담은 순식간에 와르르르 무너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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