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두 달 차
처음 고속도로를 타던 날, 내가 달리던 차선이 곧 사라지니 빨리 왼쪽 차선으로 바꿔서 고속도로로 진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아무리 두렵고 무섭더라도 과감하게 끼어들어 차선을 변경해야지, 머뭇거리다 진입하지 못하고 멈추면 그게 더 큰 일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되뇌었다.
점선이 보이자마자 깜빡이를 켜고 백미러를 슬쩍 확인한 뒤 재빨리 끼어들려던 차에 거대한 화물차가 엄청난 경적을 울리며 내 왼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엄마가 뭐 하는 거냐며 소리를 질렀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나는 당황해 차의 앞머리를 오른쪽으로 틀어 다시 내 차선으로 돌아왔고, 놀라 당황한 엄마는 너 지금 죽을 뻔한 거 아냐며 운전대를 바꿔 잡자고, 빨리 차를 멈추라고 더 크게, 더 빨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초보라지만 그 상황이 차를 길 가에 세우고 엄마에게 운전석을 바꿔 줄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나는 생각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죽지 않을 거야!
사람이 너무 놀라면 찬물을 끼얹은 듯 차분해진다. 평소 같았으면 함께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도 남았으련만 그럴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엄마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지막이 말한 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엄마의 고함 소리를 통해 우리가 방금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무슨 일이 있었건, 얼마나 위험했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상황을 감당할 사람은 운전대를 잡은 나뿐이고, 차선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어서 끼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30킬로로 시내를 달리면서도 부들부들 떨던 나였지만,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나조차도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손떨림도, 식은땀도, 심장의 두근거림도 없이 안정적으로 핸들을 살짝 틀어 무사히 옆 차선으로 끼어들었다.
고속도로에 제대로 진입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뻥 뚫린 고속도로가 눈앞에 펼쳐졌고, 나는 가속 페달을 밟아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몇 초 전의 아찔했던 상황은 그새 없는 일이 된 듯했다. 교통 상황은 정말 시시각각 변했다.
방금 우리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때까지 나는 차선을 변경할 때면 깜빡이를 켬과 동시에 최대한 빨리 끼어들었다. 끼어들 때와 끼어들면 안 되는 때를 알아차리는 것은 장롱면허 17년 차, 운전 한 달 차 초짜인 나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안전거리만 확보되면 늘 서둘러 깜빡이를 켜고 서둘러 차선을 바꿨다. 더군다나 고속도로이고, 내 한참 뒤에 있던 차였으니 깜빡이를 켜고 그 정도 거리이면 무사히 진입할 줄 알았다.
그 사건으로 나는, 내 마음이 불안하고 무섭기 때문에 서둘렀던 것이 급차선변경이었다는 것과 백미러로 슬쩍 본 뒤차의 순간 속력은 일시적이니 그 차가 그 이후 가속하는 경우를 늘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트럭과 부딪히면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차사고와 죽는 것이 두려워 운전을 못하던 나였지만, 이 사건 전까지는 정작 어떤 상황이 정말 죽을 수 있는 상황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트럭은 반응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내가 먼저 조심해야 하고, 부딪히면 백 프로 내가 죽기 때문에 역시 내가 먼저 조심해야 한다. 고로 트럭은 옆에도, 뒤에도 따라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 상황에서 내가 침착하게 계속해서 운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 상황이 무슨 상황이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모든 상황을 파악했기 때문에 그렇게 사색이 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가엾은 우리 엄마!
엄마아빠 팔도유람 시켜주고파 시작한 운전이건만, 그날 운전석에 앉은 내 옆으로 웅- 하고 지나가던 대형트럭의 바퀴를 보며 엄마는 때아닌 황천길 구경을 먼저 해야 했다. 생존율 12%의 암도 이겨낸 우리 엄마가....
어쨌거나 그날 이후로 나는 시내 운전이 한결 편안해졌다. 시내 운전이 아무리 위험해도 고속도로만큼 위험할 리는 없으니까!
그래도 그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당황은커녕, 침착하고 대범하게 대처하는 나의 모습을 만난 것은 나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내 안의 용기 있는 나를 만난 그 경험은 운전에 많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날 고속도로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나 자신에 대한 믿음, 그 믿음으로 나는 조금씩 긴장을 풀고 운전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다.
관해 판정을 받았어도 엄마는 관리 차원에서 수시로 병원에 다녀야 했다. 그 길을 늘 혼자 운전하던 엄마, 동행하더라도 운전석에만 앉아있어야 했던 내가 이제는 엄마를 모셔다 드릴 수 있었다.
운전 두 달 차가 넘어가도록 여전히 혼자 운전할 배짱은 없었지만, 적어도 엄마를 조수석에 모실 수는 있다는 사실이 나는 기뻤다. 남과 비교하면 형편없겠으나 내 지난 17년의 역사로 보면 일취월장이었다.
어느 날, 가만히 조수석에 앉아 함께 병원을 가던 엄마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코 끝이 빨개지며 말했다.
고맙다.
병원에 데려다줘서.
네 말이 맞네.
딸이 태워주는 차 타니
참 좋다.
엄마의 말에 나도 코 끝이 시큰해졌다. 이제야 비로소 자식 노릇다운 노릇을 하는 딸이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