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면허 17년 차ㅣ운전 한 달 차
차 없는 내가 늘 운전에 대한 꿈을 얘기하면 독일인 친구들은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출퇴근할 직장도 없으면서 내 형편에 차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이 그들 눈에는 사치로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에게 그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다. “부모”라는 말에 누군가는 그리움에 눈시울이 붉어지지만 어떤 이에게는 원망과 분노가 차오르듯이 나의 운전도 그들이 말하는 운전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운전은 나에게 언제나 마치지 못한 숙제와 같았다. 다음에는 끝내야지, 다음번에는 꼭 끝내야지 하면서도 밀리고 밀려 어느새 큰 돌덩이처럼 가슴에 박혀버린 무겁디 무거운 숙제!
누구 하나 나에게 그 숙제를 빨리 끝내라고 재촉하지 않았고, 심지어 내어준 사람조차 불분명했건만 기어코 해내야만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아주 거머리 같은 숙제!
운전이 정말
내 인생의 걸림돌인 것일까,
아니면
내가 운전에
까닭 없이 집착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체득한 삶의 지혜가 하나 있다면,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빨리 구분해 낼수록 삶은 여유롭고 즐거워진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귀국하면 정말 제대로 운전해 보기로, 그리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면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운전을 할 줄 안다고 해서 나까지 할 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죽어라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으며, 어쩌면 나에게는 운전이 그러한 일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운전에 대한 집착을 드디어 끝내기 위해!
귀국하자마자 가장 먼저 ‘이번에는 기필코 운전을 하겠다’고 선언했건만, 흔쾌히 ‘그러마, 그럼 앞으로 네가 몰고 다녀라’라고 했던 엄마는 귀국 한 달이 넘어가도록 나에게 운전석을 넘겨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나와 동생을 키우며 우리가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한 번도 억지로 강요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인 데다 언제나 모든 일을 직접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마는 나와는 다르게 거침없이 도로를 질주하는 훌륭한 드라이버였다.
30년 가까이 남이 운전해 주는 차만 타온 인생이다 보니 안 그래도 두렵고 떨리는 운전, 나 역시 그런 엄마를 밀어내고 덥석 운전대를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운전을 포기하기 전 마지막 도전이라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는 외출할 때 내가 운전을 할 테니 열쇠를 넘겨 달라는 나를 뒤로하고 엄마는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으며 언제나처럼 말했다.
오늘은 벌써
엄마가 앉았으니까
넌 다음부터 해!
순간 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치밀었다. 지난 17년 간 매번 운전을 하려고 할 때마다 나를 무너지게 했던 그 말, “엄마가 할게!”. 간신히 굳게 먹은 의지가 행여라도 무너질까, 눈에 힘 빡빡 주며 오늘은 반드시 내가 운전할 테니 당장 조수석으로 가라고 엄마에게 소리쳤다.
당신이 운전대를 잡으면 언제나 슬그머니 조수석에 앉아 편안히 호사를 누리던 딸이 기어코 운전석에 앉겠다고 정색을 하니 깜짝 놀란 엄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차키를 내어주며 어색하게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그 뒤로도 한 달 가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외출을 할 때마다 갖가지 이유로 운전석에 앉는 엄마를 억지로 밀어내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작심하고 시작된 나의 운전은 정말이지 해도 너무 고통스러웠다. 운전석에 앉으니 이미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고, 손바닥에는 땀이 나며 전기가 찌릿찌릿하다 못해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액셀을 밟는 오른쪽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전체 교통의 흐름을 파악하며 앞차와 뒤차, 양 옆 운전자들의 미세한 속도변화만으로도 앞으로의 진로를 예측하고, 내비게이션보다 더 정확하게 빠른 길을 찾아 운전하는 배테랑 운전자인 엄마가 코 앞의 신호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엄마는 내가 부탁했던 길 안내와 지시를 하면서 동시에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언급하며 이런저런 조언을 덧붙였고, 나는 정보의 과부하가 오기 시작했다. 엄마는 다른 차들의 의도도 읽어가며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 운전하라고 했지만, 그건 택도 없는 소리! 내 수준을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다른 차들의 의도는커녕 나는 지금 내 차가 차선을 벗어나지 않고 중앙으로 가도록 유지하는 것만도 버거웠다. 그 와중에 수시로 지금 내 신호가 빨간 불인 지 파란 불인지도 체크해야 했다. 시시각각 우리의 생명이 위협당하는 위험천만한 도로 위에서 나는 살기 위해 정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서러움이 몰려왔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으니 그만 하라며 울먹거리는 나를 보고 엄마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내가 아니었더라면 당신이 설마 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운전하는 줄 미처 인지하지도 못했을 만큼 지난 30년 간 엄마에게는 너무나 사소하고 당연했던 일들이었을 것이다.
오늘따라 차가 없어서 유난히 운전하기가 편한데 그동안 이렇게나 자주 오고 간 길이 여전히 힘드냐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깨달았다. 내가 영화 죠스의 “빠-밤! 빠-밤! 빠밤빠밤빠밤빠밤” 하는 OST를 깔고 운전하는 동안, 엄마는 슈베트르의 “송어”를 BGM으로 깔고 있었다는 것을….
얼마나 긴장을 하고 페달을 밟는지 운전을 마치고 돌아오면 항상 양쪽 무릎이 아팠다. 절뚝거리며 집으로 올라와 무릎을 어루만지며 매일같이 울었다. 운전하기 전에는 도망가고 싶어 울었고, 운전을 하면서는 도망갈 수 없어서 울었고, 운전을 마치고 나면 오늘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울었다.
운전을 하다 보면 때때로 극도의 두려움이 몰려오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머리털이 쭈뼛 서며 온몸의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운전 중에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이상 나는 우리 가족은 물론, 타인의 생명까지 담보로 하며 도로 위를 달리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무서워도 운전할 때만큼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찾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그렇게 삼킨 눈물을 집에 와서 충분히 쏟아내는 과정은 나에게 매우 중요했다.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면 가슴속이 시원해졌고, 운전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조금이나마 날아갔다.
한 달이 넘도록 주차를 해도 실력이 늘지 않았다. 주차할 때마다 옆에 탄 엄마가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코치를 해줬기 때문이다. 미묘하게 핸들의 각도를 수정해 가며 전후좌우로 차를 움직이다 보면 핸들과 바퀴의 방향성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지금까지 내가 핸들을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틀었고, 그래서 차는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하나씩 복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나를 기다려주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잘못된 걸 깨닫기도 전에 이미 각도가 틀렸다는 걸 눈치채고 취해야 할 조치까지 완벽하게 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이 매번 반복되자 엄마에게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줄 것을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 엄마에게는 그것이 악의가 아니라 한평생 자식을 사랑해 온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주차를 마치면 엄마는 나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잘했다고 칭찬했지만, 나는 그저 엄마가 하라는 대로 차를 움직였을 뿐 그것은 내가 한 주차가 아니었다.
엄마가 옆에 있는 한
나는 영원히
주차를 마스터할 수 없겠구나!
그래서 하루는 정말 주차를 끝내버리겠다는 심정으로 엄마에게 먼저 올라가 있으라고 했다. 그런 내 말에도 아랑곳 않고 기둥 옆에 서서 지켜보던 엄마는 이내 또다시 코치를 하기 시작했다.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차를 움직였다.
앞 뒤로 두 대씩 네 대나 비어있는 주차 공간에 차를 넣었다 뺐다, 넣었다 뺐다 하며 세 번 정도 후진주차 연습을 하니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어딜 가든 한 번에 주차를 성공시키는 엄마와 차 넉 대가 들어가도 넉넉한 공간에서 혼자 주차를 하면서도 20분씩 걸리는 딸!
세상에는 이런 기막힌 조합도 있었다. 요즘 말로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엄마는 차에서 내리는 나에게 덤덤하게 한 마디 던졌다.
- 잘하네.
- 잘하지,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