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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와날개 Nov 28. 2024

암도 이겨낸 엄마의 황천길 구경

운전 두 달 차

처음 고속도로를 타던 날, 내가 달리던 차선이 곧 사라지니 빨리 왼쪽 차선으로 바꿔서 고속도로로 진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아무리 두렵고 무섭더라도 과감하게 끼어들어 차선을 변경해야지, 머뭇거리다 진입하지 못하고 멈추면 그게 더 큰 일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되뇌었다. 


점선이 보이자마자 깜빡이를 켜고 백미러를 슬쩍 확인한 뒤 재빨리 끼어들려던 차에 거대한 화물차가 엄청난 경적을 울리며 내 왼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엄마가 뭐 하는 거냐며 소리를 질렀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나는 당황해 차의 앞머리를 오른쪽으로 틀어 다시 내 차선으로 돌아왔고, 놀라 당황한 엄마는 너 지금 죽을 뻔한 거 아냐며 운전대를 바꿔 잡자고, 빨리 차를 멈추라고 더 크게, 더 빨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초보라지만 그 상황이 차를 길 가에 세우고 엄마에게 운전석을 바꿔 줄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나는 생각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죽지 않을 거야!








사람이 너무 놀라면 찬물을 끼얹은 듯 차분해진다. 평소 같았으면 함께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도 남았으련만 그럴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엄마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지막이 말한 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엄마의 고함 소리를 통해 우리가 방금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무슨 일이 있었건, 얼마나 위험했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상황을 감당할 사람은 운전대를 잡은 나뿐이고, 차선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어서 끼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30킬로로 시내를 달리면서도 부들부들 떨던 나였지만,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나조차도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손떨림도, 식은땀도, 심장의 두근거림도 없이 안정적으로 핸들을 살짝 틀어 무사히 옆 차선으로 끼어들었다. 


고속도로에 제대로 진입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뻥 뚫린 고속도로가 눈앞에 펼쳐졌고, 나는 가속 페달을 밟아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몇 초 전의 아찔했던 상황은 그새 없는 일이 된 듯했다. 교통 상황은 정말 시시각각 변했다.


방금 우리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때까지 나는 차선을 변경할 때면 깜빡이를 켬과 동시에 최대한 빨리 끼어들었다. 끼어들 때와 끼어들면 안 되는 때를 알아차리는 것은 장롱면허 17년 차, 운전 한 달 차 초짜인 나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안전거리만 확보되면 늘 서둘러 깜빡이를 켜고 서둘러 차선을 바꿨다. 더군다나 고속도로이고, 내 한참 뒤에 있던 차였으니 깜빡이를 켜고 그 정도 거리이면 무사히 진입할 줄 알았다.


그 사건으로 나는, 내 마음이 불안하고 무섭기 때문에 서둘렀던 것이 급차선변경이었다는 것과 백미러로 슬쩍 뒤차의 순간 속력은 일시적이니 차가 그 이후 가속하는 경우를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트럭과 부딪히면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차사고와 죽는 것이 두려워 운전을 못하던 나였지만, 이 사건 전까지는 정작 어떤 상황이 정말 죽을 수 있는 상황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트럭은 반응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내가 먼저 조심해야 하고, 부딪히면 백 프로 내가 죽기 때문에 역시 내가 먼저 조심해야 한다. 고로 트럭은 옆에도, 뒤에도 따라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 상황에서 내가 침착하게 계속해서 운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 상황이 무슨 상황이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모든 상황을 파악했기 때문에 그렇게 사색이 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가엾은 우리 엄마! 


엄마아빠 팔도유람 시켜주고파 시작한 운전이건만, 그날 운전석에 앉은 내 옆으로 웅- 하고 지나가던 대형트럭의 바퀴를 보며 엄마는 때아닌 황천길 구경을 먼저 해야 했다. 생존율 12%의 암도 이겨낸 우리 엄마가....



 





어쨌거나 그날 이후로 나는 시내 운전이 한결 편안해졌다. 시내 운전이 아무리 위험해도 고속도로만큼 위험할 리는 없으니까! 


그래도 그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당황은커녕, 침착하고 대범하게 대처하는 나의 모습을 만난 것은 나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안의 용기 있는 나를 만난 경험은 운전에 많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날 고속도로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자신에 대한 믿음, 그 믿음으로 나는 조금씩 긴장을 풀고 운전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다.








관해 판정을 받았어도 엄마는 관리 차원에서 수시로 병원에 다녀야 했다. 그 길을 늘 혼자 운전하던 엄마, 동행하더라도 운전석에만 앉아있어야 했던 내가 이제는 엄마를 모셔다 드릴 수 있었다.


운전 두 달 차가 넘어가도록 여전히 혼자 운전할 배짱은 없었지만, 적어도 엄마를 조수석에 모실 수는 있다는 사실이 나는 기뻤다. 남과 비교하면 형편없겠으나 내 지난 17년의 역사로 보면 일취월장이었다.


어느 날, 가만히 조수석에 앉아 함께 병원을 가던 엄마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코 끝이 빨개지며 말했다.


고맙다. 
병원에 데려다줘서.
 
네 말이 맞네.

딸이 태워주는 차 타니
참 좋다.



엄마의 말에 나도 코 끝이 시큰해졌다. 이제야 비로소 자식 노릇다운 노릇을 하는 딸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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