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시간을 일기장에 쓴다는 건 과거를 정리하고 끝내려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시간의 연속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려는 발버둥일 수도 있겠다.
이번에 '나의 프로방스 일기' 책을 내면서 서문에 쓴 한 구절이다. 일기를 쓰던, 책을 쓰든 간에 과거를 되짚지 않고서는 어떠한 작품의 형태도 나올 수 없다. 그러려면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애써 감추려고 했던 기억 등 온갖 형태의 장면이 내 머릿속을 헤집는다.
나는 무척이나 복잡함을 싫어한다. 그래서 과거를 떠올리는 수고스러움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앞으로 살아갈 날도 많고, 미래를 그려가는 요령마저 조금씩 터득하고 있기에 내 인생의 앞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무엇하러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종결되어 버린 시간을 되짚어 보겠는가.
그래서 나는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도 반과거(L'imparfait) 보다 완료된 과거(passécomposé )를 좋아했다.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이 과거에 끝나버려서 지금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과거. 얼마나 깔끔한가. 내가 해온 것처럼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시제다. 그런데 반과거를 이해하기란 너무도 어려웠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끝난 게 아니라 지금까지도 반복되거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예를 들어 나의 어릴 적을 얘기할 때, 우리말로는 "내가 10살이었을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랑스어로는 "J'avais dix ans."라고 표현한다. 한국인의 시각에는 이미 10살이던 시절은 끝이나 버렸지만 프랑스어에서 10살은 지금도 살아있는 나의 모습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니까 10살이었던 그 시간은 흘러가버렸지만 10살이었던 나는 지금껏 살아있으니까 어느 정도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과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질문에 한참 빠졌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잡으며 이해하지 않으려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과거의 나는 나이고, 지금의 나도 나이면 현재를 살아가는 내 모습에 과거의 흔적이 무더기로 남아 있겠구나.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건 흘러간 지난날의 시간 속의 내 모습이었구나!"
과거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자양분이다. 좋든 싫든 시간에 갇혀있는 사람에게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거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렇게 한다면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
잘할 수 있을까?
이제 깨달았으니 조금씩 노력해 보면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