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21. 집중할 때 만나는 미래의 나
세르비아를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내가 세르비아에 대한 엄청난 호기심이 있거나 나는 이곳을 꼭 가봐야겠다고 하는 대단한 결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9월 생일을 코리빙에서 보내고 싶은데 쉥겐지역에 있으니 날짜를 계산해 봤을 때 지브랄타에서 휴식을 취하고 나서 미리 예정되어 있던 나의 학회메이트 클라리스와의 이탈리아 휴가가 끝나는 대로 바로 쉥겐지역을 벗어나서 두 달 반을 보내야 했다. 그럼 쉥겐 밖에서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들고,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환경이 어디가 있을까 하다가 찾아낸 곳이 바로 세르비아에 있는 손타코리빙이었다.
손타Sonta라는 마을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국경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데, 아주 작고 평화로운 곳이다. 마을 기차역에서 아주 가까운 손타코리빙은 시설은 겸손하지만 주인커플인 니콜라와 사라가 정말 마음으로 돌보는 곳이라,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지내고 있다. (주인커플은 내가 지내는 동안 헤어졌다.)
지금 이 책도 이곳에서 초고를 쓰고 있는데, 니콜라가 좀 쉬어가면서 하라고 할 정도로 몰입해서 하고 있다. 닷새만에 책의 절반을 썼고, 하루 꼬박의 시간을 들여 출간기획서를 써서 한 친구에게 검수를 부탁하고 수정해서 10개의 출판사에 보내는 것까지 완료했다. 세르비아에 와서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한 게 이 일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네? 하는 것은 아니다.
출간기획서를 봐주던 친구 킴제이가 물었었다.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실행을 하게 된 멋진 이유가 있냐고. 대답했지. 어, 나 있어. 완전 있어.
스위스에서 사직하고, 스페인에서 나의 겨울을, 죽음, 슬픔, 재정비를 기리고 기념하고, 멕시코에서 해고당하고, 과테말라에서 꿈에 대한 일깨움을 받고, 하면서 겨울을 보냈잖아. 그리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시간을 보냈지. 스위스에서는 집의 꿈을, 스페인에서는 사랑의 꿈을 조금씩 그려나가기 시작하는 걸로.
그런데 내가 꿈을 안 꾸고 오래 살았다고 그랬잖아. 꿈을 꾸는 걸 다시 해야겠다고 했는데 시작을 하긴 했어도 그게 잘 되겠어? 갑자기 다시 하려니 잘 안되고 그러지. 봄이 되었어도 새싹이 흙 위로 나오는 게 아직 땅이 차갑거나 굳어있으면 나오기 힘들잖아. 그런데 이게 이제 충분히 따뜻해진 거야. 세르비아에 와서 일의 꿈을 꾸려고 계속 북클럽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 생각하고, 결국 내가 이루고 싶은, 세상에 가져다 놓고 싶은 내 일의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한 모습과 내 일의 가치에 대해서 그려보고 하는 와중에, 정말 뜬금없이 한 대화가 끼어든 거지.
작년에 온라인 기록 스터디를 같이한 오기 님하고 여행 얘기를 하는데, 그분이 그러는 거야. 우리 대화 중에, 하와이에서 꽃농사짓다가 추울 때 맞춰서 태국을 가시는 할머니도 계시던데, 어디 가고 싶다, 하는 이야기를. 거기에 대꾸하는 말로 난 어디 어디 갔었다 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가는데 그 와중에 내가 그랬거든. 여행지를 선택하는 데에 나의 인생의 계절에 맞춰가는 것도 있다고. 지난해에 스위스 그렇게 간 거 얘기하고.
“어디를 가게 될지를 정하는 건, 나의 인생의 계절에 맞춰가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뭐야, 이 문장 다이어리에 적어놓고 나중에 책 쓰면 내줘요.”
“책 쓰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항상 있는데, 에세이를 쓰기엔 세상이 나를 너무 모르고."
나중에 책 쓰면 달라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창을 열였고, 그 대화를 마치고 프롤로그 전문하고 목차를 다 썼다. 그리고 일주일 사이에 챕터 14까지 왔다. 그러고 나니까 쓰면서 알겠더라고. 책을 쓰는데 힘들지가 않아. 그렇게 계속 적어 나갔다. 뭘 써야 하나 머리를 싸매지 않고 적어나갔다. 2024년 이야기는 버벅거리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꿈에 대해서 다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오기님과의 대화를 시작점으로 쓰게된 감사함 이후에 따라온 킴제이와의 대화에서 느꼈던 감사함이다. 나에게 그 질문을 해줘서 고마워. 실행에 대한 멋진 이유를 물어봐 줘서.
“즐겁고 재밌고, 책이 나왔을 때를 생각하면 웃음이나. 이게 그냥 상상이 아니고 내 안에는 이미 실현된 일이라. 그래서 알았지. 꿈이라는 게 내 안에 실현된 일을 사는 거구나.
"꿈을 우주 먼지 속에서 막 하나하나 붙잡아서 빌어가면서 하는 게 아니고 이미 내 안에 씨앗이 있는 거를 키워서 내놓는 일이구나. 내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오기님의 저 말에 바로 시작을 할 수 있었지. 그리고 그대가 말한 것처럼 시간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씨앗이 내 안에서 컸던 거고. 나올 준비가 되었어. 모든 건 예정되어 있었어.
“이걸 알게 되니까 왜 이전에 꿈을 막 애써서 꾸려고 해도 안되었는지를 알겠더라고. 내 안에 실현이 안되었는데 자꾸 애를 쓰니까 꺼내기가 어려운 거였어.”
세르비아에 올 때 뛸 준비가 되었었는데, 어디로 뛸 줄은 미처 몰랐던 나. 매일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향으로 만족하는 수준으로 뛰는 날은 잘 없다. 책의 절반을 완성하고 기획서까지 돌린 일주일을 제외하고는. 운동을 빼먹지 않고 하는 것도, 건강하게 챙겨 먹는 것도, 시간을 규칙적으로 보내는 것도. 다 높은 기준으로 따져보자면 미달이다. 난 완벽한 사람은 아니니까, 이 정도면 괜찮지.
세르비아에서의 삶은 누가 보면 참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구나 할 건데, 이상하게 나는 괜찮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나 싶은 생각도 그래서 들었다. 일 년 중 몇 달 정도는 한국에서 지루하게 지내는 것도 괜찮으려나. 세르비아에서는 자고, 먹고, 씻고, 운동하고, 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거의 아무것도 안 한다. 일주일에 특별활동을 하는 것은 많으면 한 두 번이다. 지금까지 다뉴브강에 낚시 다녀오고, 바이커축제랑 어부축제에 다녀왔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사는 게 일상일 때가 나도 있었다. 일어나서 양치질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고 밥 해 먹고 밤이 되면 씻고 자고.
그런데 세르비아에서의 그 시간이 다른 이유는 뭘까. 이곳에는 일상의 상처가 없는 곳이고, 돌봐주는 남인 사라와 니콜라가 있어서일까. 내가 뛸 준비가 되어서였을까. 그걸로 충분했던 걸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뛸 준비가 되었을 때 한국이었으면 미친 듯이 몰입해서 달린 일주일이 가능했을까. 답은 없다. 모르지 그 길은 안 가봤는데.
내가 아는 것은 하나, 나의 봄이 세르비아하고는 맞아떨어졌다는 것. 조용히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고 새싹을 틔우는 그 봄과 세르비아는 좋은 조합이었다. 지금의 봄이 좋은 건, 겨울을 잘 보내서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엔 겨울이 싫었는데 이젠 싫지 않다. 겨울은 꼭 필요한 것임을 안다. 나는 나의 사계절이 다 좋아 다 그 쓰임새가 있고 그에 따라서 흘러가는 내 삶을 관찰하는 게 너무 재밌어.
겨울이 달라지니 죽음이 달라진다. 죽은 부분은 잘 묻어주면 된다. 그 부분을 탈탈 털어서 잘 모아서 무덤을 만들어주고 충분히 기리고 슬퍼하고 그렇게 보내주고. 그럼 나는 새로운 선택을 할 준비가 되었고. 그렇게 나는 새로운 선택을 한다.
남은 봄은 어떻게 흐를까. 다가오는 여름은 어떤 여름일까. 켠켠이 다른 계절의 기억이 쌓일 앞으로의 날들이 기대가 된다. 웃음이 나온다. 꿈을 꾼다. 내 안에 실현될 여름의 꿈은 무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