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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Mar 08. 2024

뜨끔, 여행에 눈 뜰 때

가쓰시카 호쿠사이_풍류없어도 일곱 버릇: 망원경(1801~1804)

딸은 오른쪽 눈을 크게 떠서 몰입합니다.
호쿠사이는 이 그림에 이런 센류를 지었습니다.
‘皮切りといふ面で見る遠眼鏡’
처음 뜸을 뜰 때처럼 얼굴을 찡그린 채 보는 망원경

<'풍류 없어도 일곱 버릇 망원경 風流無くてななくせ' 가스씨카 호쿠사이>


집중집중, '뜨끔'한 여행의 순간


여행은 호기심이죠.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걸 직접 확인하고 싶은, 먼 대상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욕망을 망원경만큼 잘 드러내는 도구는 없을 거예요.


우키요에의 대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풍류 없어도 일곱 버릇 망원경’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망원경을 보고 있는 여인은 딸입니다. 엄마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어요. 딸은 오른쪽 눈을 크게 떠서 망원경 너머 세상으로 몰입합니다. 접안렌즈 반대쪽 눈은 절반쯤 감은 채죠. 입술은 저도 모르게 살짝 열려 있어요. 이토록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이라니요.  호쿠사이는 이 그림에 이런 센류川柳를 지었습니다.


‘皮切りといふ面で見る遠眼鏡’


풀어쓰면 '처음 뜸을 뜰 때처럼 얼굴을 찡그린 채 들여다보는 망원경' 정도. 한의원에서 뜸을 뜰 때, 뜨거운 쑥이 타들어가다 ‘뜨금’하는 순간, 자연스레 얼굴이 찡그러집니다. 호쿠사이는 망원경 너머 풍경에 집중한 딸의 표정을 이처럼 익살스럽게 표현했습니다.


<청명한 아침의 시원한 바람 凱風快晴, 가쓰시카 호쿠사이>

‘처음 뜸 皮切り’에 비유했으니 딸의 첫 여행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호쿠사이는 딸의 표정에서 처음 여행을 떠난 이가 마주한 경이로움을 보았을 수도 있어요. 작품의 제목은 ‘풍류, 없어도 일곱 가지 버릇, 망원경’이입니다.


‘없어도 일곱 가지 버릇’은 누구나 버릇 하나는 가지고 있다는 일본 속담입니다. 그림 속 딸은 막 풍류에 눈을 떴고, 이제 여행은 그녀의 버릇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곁에서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이 염려스러워 보이네요.


제게도 ‘첫 뜸’의 기억이 있습니다. 서른 살에 첫 해외여행을 떠났어요. 국내여행은 자주 갔지만 해외여행은 또래보다 늦은 편이었죠. 공항 출입국심사대 앞에서 친구 뒤를 졸졸 따라 들어갔어요. 첫 해외여행이고 처음 받는 출국심사라 그 과정을 잘 몰랐던 거죠.


출국심사원이 ‘뭐지?’하는 눈빛을 보냈습니다. 곧 가볍게 물러서라 손짓했어요. 그제야 출입국심사는 한 번에 한 사람씩 받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얼굴이 얼마나 화끈거리던지요. 처음 뜸을 뜨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을까요.(덕분에 현지 입국 심사는 ‘혼자서’ 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神奈川沖浪裏, 가쓰시카 호쿠사이>


조금씩 다른 상황이기는 해도 우리에게는 처음 뜸을 뜨는, 여행의 뜨거움을 마주한 첫 순간이 있죠. 그건 기대하며 그려보던 첫 여행의 멋진 장면과는 달라서, 얼마간은 창피하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곧 그 반대의 뜨거움도 만나게 돼요.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올 즘입니다. 발밑으로 목적지의 도시 전경이 보입니다. 까마득한 거리임에도 그 구석구석의 생김이 내가 사는 곳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걸 단숨에 알아챌 수 있어요. 미지와의 첫 조우, 그 장엄한 세계라니요.


그때 '뜨끔'하던 기꺼움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마 창에 비친 내 얼굴은 망원경을 보고 있는 딸의 표정과 또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요.


< (좌)Camille Monet in a Japanese Costum 클로드 모네, (우)Bridge in the rain: after Hiroshige, 빈세트 반 고흐>


여행이란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우키요에(浮世絵)의 한자 부세(浮世)는 부유하는 세상을 뜻하죠. 여행은 얼마간은 세상을 부유하는 일이기도 해요. 여행의 발자국은 우리를 미지의 화폭 속으로 안내하지만, 그 여행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그리하여 내 마음에 어떤 심상으로 남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행은 사색이나 모험, 유랑 또는 풍류라는 말과도 좋은 친구가 됩니다.


첫 해외여행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발 디딘 나라와 도시, 대륙의 수는 늘어났어요. 그렇지만 세상을 부유하길 바라는 마음은 여전하고 또 쉽사리 떨쳐지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곳에서  우키요에처럼 내 운명을 바꿔놓을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는 열망 때문일까요? 아마도 여행이란 세 살 버릇은 여든이 되어도 쉽게 고쳐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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