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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Feb 23. 2024

에드워드 호퍼2_여행,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간

와이오밍의 조(1946)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 되어간다는 느낌이다.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사물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당신도 잘 알 것이다.

[굿하버해변에서 스케치하는 조, Jo Sketching at GoodHarbor Beach, 1923~1924, 에드워드 호퍼, 휘트니뮤지엄 소장]


호퍼, 조세핀 그리고 여행의 날들 


아내는 여행지에서 가끔 제 사진을 찍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리곤 합니다(화가는 아니고 목수예요). 몇 년 동안 그린 그림은 적잖은 양이어서 그 두께가 시간을 증언합니다. 여행의 날들만 있는 건 아니고, 병원을 오가던 날들도 있고, 평범하고 무료한 일상의 날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 안에는 그림만 있지 않고, 그날들의 이야기가 있어 우리를 울고 웃게 하지요.


호퍼와 아내 조세핀은 오랜 여행의 동반자였습니다. 앞서 말했듯 기차로 미국을 횡단했고, 사우스트루로에 자신들만의 별장을 지어 오갔으며, 캐나다, 멕시코 등을 여행하며 작업하기를 즐겼습니다. 호퍼는 여행에서 수채물감으로 아내 조세핀을 즐겨 그렸습니다. 


‘굿하버해변에서 스케치하는 조’는 1923년에서 1924년 사이 그림입니다. 두 사람은 1924년에 마흔 살이 넘어 결혼했어요. 그러니 연애 시절 여행에서 조세핀을 그린 그림일 겁니다. 조세핀은 촉망받는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수채화를 잘 그렸는데 호퍼는 그녀의 영향으로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해요. 호퍼가 화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브루클린미술관에 선보인 수채화였어요.


[트루로 집에서 스케치하는 조, Jo Sketching in the Truro House, 에드워드 호퍼, 휘트니뮤지엄 소장]


호퍼가 그린 조의 뒷모습


 ‘트루로 집에서 스케치하는 조’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그린 또 한 편의 수채화입니다. 역시 조세핀이 모델입니다. 1934년은 두 사람이 사우스트루로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난 후, 그곳에 별장을 마련한 해이기도 해요. 호퍼는 그해 여름 자신들의 별장에서 창밖을 보며 스케치하는 조를 그리고 있네요. 


조는 ‘햇빛 속의 여인’ ‘이층에 내리는 햇빛’ 등 호퍼의 많은 그림 속에 등장하지만, 이들 여행의 길 위에서 호퍼가 그린 수채화는 이후의 유채와는 달라요. 호퍼는 조세핀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어요. 좀 더 경쾌해요. 그것은 호퍼의 의지라기보다 조세핀이 뿜어내는 기운에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호퍼의 그림 속 조세핀을 보면 알 수 있듯, 조세핀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기 원했죠. 하지만 호퍼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했어요.  그 작품 속에서 조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조는 그림을 그릴 때 스스로에게 더 빛나는 사람이었을까요?


[와이오밍의 조, Jo in Wyoming, 1946, 에드워드 호퍼, 휘트니뮤지엄 소장]


표정 있는 호퍼의 그림, 와이오밍의 조


‘와이오밍의 조’는 사우스트루로 시절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입니다. 두 사람은 조금 더 나이를 먹었고 여전히 여행 중입니다. 한갓진 하루, 목적 없는 여행의 길 위에서 그들은 차를 멈춥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대지와 산맥은 넓고 장대합니다. 호퍼는 뒷자리에 있습니다. 백미러 너머로 어렴풋하게 그의 그림자가 보이네요. 


이 그림은 무척이나 특별합니다. 호퍼의 그림 가운데 이례적으로 인물의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까닭입니다. 그림 속 조는 밝고 유쾌해 보입니다. 여느 날처럼 무뚝뚝한 조에게 말을 걸고 있겠죠. 해변을 거닐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사우스트루로의 풍경을 보며 그림을 그리는 두 사람을 상상합니다. 풍경을 그리는 조세핀과 풍경을 그리는 조세핀을 그리는 호퍼, 조와 호퍼에게 이날들의 여행은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요?


[(좌) 햇빛 속의 여인(1961) / (우)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호퍼의 뒷모습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호퍼의 많은 것은 조세핀의 손끝에서 일어났습니다. 조세핀은 호퍼의 딜러이자 큐레이터였고 홍보 담담이었으며 마케터였어요. 그 일을 무려 30년 이상 지속했죠. 심지어는 두 사람이 함께 보았던 연극표까지 꼼꼼하게 모아뒀습니다. 호퍼의 그림 속 연극적인 요소는 그날들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호퍼가 죽고 나서 2,500여점에 이르는 호퍼의 작품과 자료를 휘트니미술관에 기증한 것 역시 그녀였어요. 


실상 두 사람은 많은 게 달랐습니다. 호퍼는 키가 2m에 가까웠고 조세핀은 152cm에 불과했어요. 호퍼는 과묵했고 조세핀은 명랑했습니다. 성격이 다른 둘은 자주 싸웠고 다툼은 호퍼의 가정 폭력으로까지 이어졌어요. 조세핀의 일기에는 호퍼에게 폭행당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이들의 여행 속 그림에 기댄 낭만은 지워집니다. 사랑과 여행을 다시 묻게 되죠. 


[호퍼와 고양이를 안고 있는 조세핀(1960)]

함께 여행을 한다는 건


우리가 가까운 이와 같이 여행하는 건 아름다운 순간을 함께 간직하기 위함이고, 그 추억의 힘으로 오늘을 살아내기 위함입니다. 일상 가득한 현실에서는 좀체 마주할 수 없는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간, 그건 사랑이라 부르기에 너무 거창하고 행복은 또 너무 과장스럽지만, 백미러 같은 여행을 통해서 사소하고 익숙한 여행의 하루는 그렇게 한 걸음씩 서로에게 밀착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호퍼는 한 인터뷰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 되어간다는 느낌이다.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사물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당신도 잘 알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행의 길 위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건’ 풍경 속 사물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때 아름다운 것들은 기억에 남을 의미 있는 어떤 것들, 일상에서보다 가까이 보이는 사소한 것들이기도 하겠지요. 계속되어 간다는 느낌이 중요한 건 그런 이유일 테고요. 그렇게 계속되어 가는 것 가운데 조세핀도 있었다는 걸, **그가 조금 더 일찍 진중하게 알아챘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가 그린 수채화 속의 조세핀처럼요.    






* William C. Seltz, Edward Hopper in SauPaulo 9(Washington D.C: Smithsonian Press, 1969) 22. / '에드워드호퍼 길위에서' 展(서울시립미술관)'  소개 책자 번역 인용


**80세가 넘은 후 호퍼와 조세핀은 한 병원의 다른 층에서 생활했습니다. 호퍼는 아내의 입원실로 매일 병문안을 갔다고 하네요. 호퍼는 1867년 사망했고 10개월 후 조세핀 역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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