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1972)
일로든 쉼으로든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나에게 ’이방인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곳에서는 내가 누구였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진가에게 여행이란 활력이자 담금질의 시간인 것 같다.“
<공명의 시간을 담다>(구본창/컬처그라피)
2015년 서울사진축제 심포지엄에서 ‘서울, 일상을 여행으로 만드는 도시’를 주제로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사진과는 거리가 있지만 서울 여행 작가로서 주어진 자리였어요. 행사장에서 구본창 작가를 스치듯 만난 기억이 나네요. 제 앞 강연자가 구본창 작가였죠. 강연를 끝내고 내려올 때 잠깐 인사를 나눴어요. 제게 그의 사진은 깊고 강한데 그의 짧은 인상은 마르고 수줍은 사람이었습니다.
‘구본창의 항해’ 전시는 그의 수집품을 전시한 ‘호기심의 방’을 지나, ‘모험의 여정’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해요. ‘모험의 여정’ 전시 글의 첫 문장은 ‘구본창은 타고난 내성적인 기질과 섬세한 감각으로’였어요.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을 마주해요. 1972년 상주해수욕장에서 자신을 찍은 ‘자화상’입니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는 마치 ‘박히지 못한 쇠못’ 같아요. 젊은 날의 가늘고 단단한 뒷모습은 모래밭 위에 위태하게 존재하죠.
이번 전시 제목인 ‘구본창의 항해’는 그 한 장의 사진 ‘자화상’에서 탄생했다고 합니다. 항해는 여행과 닮은 듯 다른 말입니다. 항해는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다님’이란 뜻과 함께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죠. 구본창의 ‘항해’에는 몇 번의 결정적인 여행이 등장해요. 그 여행은 자주 ‘상실’로부터 비롯해요. ‘항해’라는 제목을 빌려오자면 그에게 여행은 상실을 딛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감이 아닐까 싶네요.
구본창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연세대 경영학과에 진학하고 졸업 후 무역회사에 입사해요. 하지만 틀에 짜인 회사 생활과 강압적인 조직 문화를 견디지 못하죠. 이직 후 독일 주재원으로 떠나요. 그렇게 도착한 독일에서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교에 입학해 사진을 전공하며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됩니다.
유학 중에는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파리, 런던, 베를린 등 유럽 여러 도시를 여행해요. '초기 유럽-컬러' '초기 유럽-흑백' 등은 당시 작업한 작품들입니다. 감각적이지만 날이 서 있어요. 하지만 존경하던 사진작가 안드레 겔프게를 만나 ‘(여느 유럽 작가가 찍은 것이 아닌) 자신의 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겠나?’라는 조언을 들어요. 작업의 방향이 바뀌죠. 졸업 작품으로 준비 중이던 '초기 유럽-흑백'을 '일분간의 독백'으로 수정해요. 4장의 B컷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죽음의 숫자 4'死'라는 동음의 의미를 갖고 있어요.
그 1분 안에는 '이방인으로서 나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 어머니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독일에 온 다음에 돌아가셨죠. 그에게 어머니는 특별한 분이셨어요. <공명의 시간을 담다>에서 자신의 사진을 ‘어머니에게서 배운 애정 어린 시선’으로부터 비롯됐다며, ‘이런 애틋한 감정과 기억들을 기록하고 간직하려고 사진가가 된 모양’이라 말해요.
그러니 ‘일 분간의 독백’은 그의 사진 항해의 첫 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일 분’의 많은 사진들은 여행에서 포착한 순간들이지만, 잡을 수 없고 멈춰세울 수 없는 시간이서서 상실과 죽음의 은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의 독일 유학생활은 그 상실감과 마주하는 여정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 ‘구본창의 항해’ 전시(2023.12.14~2024.03.10)를 보고 와서 쓴 글입니다.
- 전시의 소개 글과 그의 책 <공명의 시간을 담다>에 있는 일부 문장을 인용(표시)했습니다.
- ‘박히지 못한 쇠못’은 위의 인용 글과 무관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