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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Mar 01. 2024

구본창 상실의 항해2_ 살아가야 할 내일의 장면

시간의벽(1998) & 화이트09(1999)

주변의 작은 목소리를 듣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애정이 필요하다.
따뜻한 눈이 있어야 보이고 읽힌다.
아마도 나는 이런 애틋한 감정과 기억들을 간직하려고 사진가가 된 모양이다.

                                     <공명의 시간을 담다>(구본창/컬처그라피)



[서울시립미술관 '시간의 벽' 전시 모습]


상실, 벽을 마주하는 행위


이번 '구본창의 항해' 전시에서 제게 가장 좋았던 작품은 ‘시간의 그림’이었어요. 그게 어느 사찰의 벽이란 걸 어렵잖게 알 수 있었어요. 저 또한 어느 해인가 수덕사 대웅전 앞에서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있어요. 말 없는 벽은 말할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해서 이별한 마음에게 큰 위로가 되었죠. 


1980년대 중반 그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요. 그리고 사진가로 자리를 잡은 1996년 이번에는 아버지를 잃어요. ‘탈진한 듯 막연한 시간을 보내’죠. 그 상실감을 털어내기 위해 택한 건 여행이었습니다. 교토 여행에서는 고찰 도지(東寺)에 들러요. 그곳에서 대웅전 외벽을 마주합니다.


[시간의 벽 01,  1998(좌), 숨 05, 1995, 구본창, 서울시립미술관 보도자료]


그게 낡고 오래된 벽이라서 감흥을 불러내는 것 같아요. 상실은 벽을 마주하는 행위일 테니까요. 그는 옛 사찰의 회벽을 보며 인도의 어느 글귀를 떠올려요. 


 이 세상이란 먼지가 모여 이뤄진다

'시간의 그림'은 그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한, 때로는 우리의 먼 미래를 그린 자화상 같기도 해요. 같은 벽을 찍었지만 벽에 어린 세월의 때들이 저마다 다른 것도 그런 까닭이겠죠. 우리는 모두 다른 생의 얼룩을 만들며 살아가요. 그러다 먼지가 되겠죠. 


찰 도지(東寺)의 벽 속으로 스며듭니다. 걷고 멈추기를 반복해요.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꿈속을 나란히 거닐어요. 먼지 하나 닿지 않은 처음의 벽을 상상하고, 자연의 간섭이 남긴 시간의 두께를 따라 갈라지고 부르튼 손등 위를 걷습니다. 그래서 ‘시간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가 촬영한 ‘숨’시리즈 속 병상의 아버지가 내뱉는 숨들이 그 회벽 위에 새겨진 듯도합니다. 


[서울시립미술관 ‘문 라이징 III’ 전시 모습]


시간의 벽, 공명의 시간


‘시간의 그림’은 그의 이전 사진과는 달라요. 제게는 ‘박히지 못한 쇠못’ 같던 그의 사진들이 벽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또렷하게 상처의 흔적을 남기며 박히는 못이 아닌 마치 물처럼 스며드는 듯했어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그의 작품 ‘백자’시리즈는 그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시간의 그림’이후 그가 촬영한 ‘오션’ ‘화이트’ ‘자연의 연필’ 등을 들여다봅니다. 그가 스스로를 치유하며 떠난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만 같아요. 그게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 있는 내게도 담담한 위로가 됩니다.


생명의 숨소리가 들리는 순간들에 인위적인 파격을 가하지 않고
...오히려 추상에 가까워진 단순화된 이미지 속에는
보다 깊은 공간과 많은 이야기와 흔적들이 담겨 있었다.


그는 '여행은 나에게 ’이방인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하죠. '사진가에게 여행이란 활력이자 담금질의 시간인 것 같다.'고요.  하지만 그가 말하는 ‘이방인의 즐거움’이 기쁨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활력이란 글자 그대로 풀어쓰면 ‘살아 움직이는 힘’일 테니까요. 


[구본창, 화이트 09, 1999]


화이트, 겨울 끝 내일의 장면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않는, 나의 사연을 묻지 않는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이 상실 후라면 슬픔 바깥의 나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 될 테고요. 그때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때로는 상실의 슬픔이기도 해요. 


슬픔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슬픔으로부터 이방인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다죠.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슬픔을 슬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슬픔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요. 그러므로 여행은 여행으로 머물지 않고 항해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자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위로하고 위로받는 영혼의 사원’이 되어줍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화이트' 앞으로 돌아와 멈춰섭니다. 낙엽 지고 난 후 담쟁이의 겨울을 찍은 사진입니다. 눈 한 점 없는 사진이지만 순백의 설경처럼 다가옵니다. 그 위에 자연이 디딘 겨울의 발자국이 보입니다. 


젊은 날의 그 쇠못은 여전히 가늘지만 이제 시간에 흔들릴 줄 아는 바람이 된 듯합니다. 그래서 그의 사원에서 머무는 짧은 여행은, 여전히 잃어버린 시간을 지나가고 있는 저에게  상실 그 다음의 장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할 내일의 장면이이기도 했습니다. 



 




구본창의 항해’(00월 00~000월 00서울시립미술관 전시를 보고 와서 쓴 글입니다.

전시의 소개 글과 그의 책 <공명의 시간을 담다>에 있는 일부 문장을 인용(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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