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리브>(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문학동네이채훈/혜다)
모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함께 있다는 것을,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을
얼마나 쉽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가!
춘천 책방 바라타리아에 관심이 생긴 건 ‘미미책 선물’ 때문이었습니다. 풀어 쓰면 ‘미래로 보내는 미리 계산한 책’입니다. 책방을 방문한 어른들이 2층 서가에서 책을 골라, 미미책 서가에 짧은 메시지와 함께 비치합니다. 그럼 책방을 방문한 청소년(14~19세)들은 원하는 책을 무료로 가져가는 방식입니다. 맡겨 둔 커피, 카페 소스페소처럼 말이죠.
책방지기 강은영·장남운씨 부부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년 시절 일화에서 착안했다고 해요. 하루키는 동네 책방에서 원하는 책을 마음대로 가져다 읽곤 했는데, 훗날 부모님이 책값을 따로 지불하고 있다는 걸 알았죠.
미미책선물 서가 앞에 서면, 짧은 메모들이 책의 왕래를 짐작게 해요. 어른들의 메모는 추천사나 짧은 엽서 같죠. 또는 자신의 옛 시절에 건네는 늦게 온 고백을 닮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이 책을 보냅니다
이 글귀는 ‘지구에서 한아뿐’(정세랑/난다)을 선물한 이의 메모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클레어 키건/다산책방)을 택해 선물한 이는 이렇게 적었죠.
마지막 문장의 여운과 함께 좀더 나은 내가 되고 싶고,
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게 되길 응원합니다
답장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책을 가져가면서 ‘간단한 메모 작성과 조금 쑥스러운 퍼포먼스(인증사진을 남기는 것. 얼굴로 책을 가려도, 뒷모습을 보여도 상관없어요)’를 남기는데요. 사진은 미미책을 선물한 어른에게만 전달합니다. 다행히 남긴 메모는 서가 한쪽 벽에 붙어 있어요.
‘나를 더 사랑해 주기 위해서’
‘슬픔의 자리에서 비로소 열리는 가능성에 대하여’라는 문구 때문에
‘시인을 꿈꾸고 있어서’
무심한 답도 없진 않지만 십 대의 데면데면한 쑥스러움이란 걸 왜 모를까요. 청소년들의 책 선택은 기대처럼 떳떳하고 뜻밖에도 꿋꿋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아리기도 하죠. 김애란 작가의 소설 ‘바깥은 여름’을 집은 아이는 자신의 별명을 ‘고장 난 시계’라고 적었습니다.
김애란 작가는 책 서두에 ‘누군가의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거나 놓은 내 친구들처럼’이란 글로 시작합니다. ‘바깥은 여름’이 아이의 시계추를 다시 흔들어 깨우는 태엽 감기가 되어 주었기를 바라게 되네요.
바라타리아를 연 강은영·장남운씨 부부는 책방을 꿈꾸며 10년을 준비했다고 해요. 직장을 다니며 주말에는 전국 200여 서점을 순례했죠. 춘천에 터를 잡기로 한 후에는 책방을 지었어요. 꾸렸다는 말로는 부족하죠. 3층 건물은 처음부터 오직 책방의 용도로 춘천 출신 건축가에게 의뢰해 설계했거든요.
입구부터 의도가 있어요. 주황색 문은 그 너머를 보여주지 않죠. 상업 공간은 안이 잘 보여야 주의를 끌기 때문에 투명한 유리문이 일반적이죠. 그들이 원한 바는 달랐어요. ‘돈키호테’에 나오는 바라타리아! 그곳은 책장을 넘기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유토피아이고, 책장을 넘기듯 손끝에서 체감되는 시작이었으면 했어요.
바라타리아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에서, 시종 산초가 다스린 섬입니다. 기대보다 다분한 조롱의 제안이었지만 산초는 무척 훌륭하게 다스리고 퇴임할 즈음에는 섬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소유 없이 물러나요. 부부는 자신들의 책방이 산초의 바라타리아와 같은 책의 섬이 되기를 바랐다고 하네요.
유안진 시인은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라는 시를 썼어요.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라고 했죠. 막연하게 꿈틀대는 긍정들, 다다르고 싶은 이상들. 실은 바라타리아는 새해에 처음 다녀온 책방입니다. 지난 1월이었어요. 바라타리아의 1월은 왠지 봄의 기운을 닮아 춘천은 까닭 없이 당도하고픈 내일의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책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에요. 사전에 없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아니라서 ‘책의 인연’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미래로 보내는, 미리 계산한 오늘의 책연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요? 참, 유안진 시인의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는 부부가 후보로 올렸던 책방 이름 가운데 하나라고 하네요.
<다시, 올리브>(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문학동네이채훈/혜다)
손난로 대신 책 한 권을 들고 서성이는 동안 창밖으로 눈이 내립니다. 소복소복 쌓이는 미래들. 하지만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고될 것을 먼저 걱정하지 않기로 해요. 대신 미미책선물을 고르는 어른이 됩니다. 매수와 매도의 타이밍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새해를 여는 첫 번째 투자로 이보다 좋은 선택은 없겠죠.
모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함께 있다는 것을,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을 얼마나 쉽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가!
옆지기와 고민 끝에 고른 책은 ‘다시, 올리브’(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문학동네). 2008년 퓰리처상 수상작 '올리브 키터리지'의 후속작입니다. 이 책을 보게 될 내일의 그들에게 짧은 메모를 더합니다. 실은 우리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해주고픈 말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또다시 뭐든 해 보는 새해 맞이하기를.
새해 결심처럼 비장한 각오조차 필요 없는, 언젠가 이 마음에 화답하는 소녀와 소년이 책을 품에 안고 돌아갔으면 합니다. 발걸음도 가볍게 총총총, 룰루랄라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어제보다 오늘 더 활기차게. 그 가락이 1월의 결심을 잊은 채 살아가던 10월이나 11월의 우리에게 ‘단풍도 꽃이 되겠지… 春川(춘천)이니까’ 하는 시인의 노래처럼, 오늘의 고운 함박눈처럼 다다랐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제가 서울신문에 기고 중인 박상준의 書行(서행)에서 일부 발췌 후 편집했습니다.
※ 전문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seoul.co.kr/news/plan/travel-story-psj/2024/01/12/20240112014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