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준 Mar 06. 2024

제주 김영수도서관_도서관은 (000)이다.

<하루 흔적 끄적이기>(제주북초등학교 6학년 2반)


제주목 관아가 보이는 창가에서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는 정도의 쉼을 기대했다가,
포스트잇의 비뚤비뚤한 아이들의 생각부터 꼼꼼하게 읽어 나갑니다.
슬며시 한두 장 떼어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 내면서.


양옥 안에 한옥의 도서관


영수도서관은 생김부터 특이합니다. 기존 2층 건물의 1층에 한옥을 집어넣은 형태입니다. 본래 한옥이었고 모자를 씌우듯 2층을 더한 줄 알지만, 한옥은 리모델링 과정에서 새로이 추가했습니다. 전국 어디에도 이런 생김의 도서관은 없어요.


우리네 한옥이 그러하듯 신발을 벗고 입장합니다. 내 집, 내 방으로 들어가는 듯해요. 복도를 따라서는 한옥의 툇마루가 불쑥 튀어나와 있어요. 안쪽에는 1평 남짓한 제주의 좌식 온돌방이 다섯 실입니다. 방과 방의 문을 닫으면 개개의 열람실인데 열어 두니 하나의 긴 방입니다.



한옥방은 서까래가 드러나죠. 서까래를 받친 도리에는 김영수씨가 후배들에게 남긴 ‘終始一誠 有言實行’(종끝까지 처음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며 자기가 한번 말한 것은 실천하자)이라는 글이 적혀 있어요. 동백 그림과 ‘행복하게··’ 같은 글귀들도 남겨져 있고요.


문은 방안에서 야외로도 열려요. 작은 마루(테라스)가 나오는데 마루와 마루에는 ‘개구멍’이 있어 아이들의 장난기를 자극해요. 날씨가 조금만 따뜻해지면 안보다는 바깥 마루가 인기겠어요. 인도로 길을 지나는 마을 사람과 눈을 맞출 수도 있죠. 가벼운 인사말이 오갈 법해요. 



학교와 마을이 같이 쓰는 도서관


도서관 2층 ‘목관아가 보이는 책뜰’도 놓칠 수 없어요. 도서관 길 건너편은 제주목 관아인데 목관아의 2층 망경루(望京樓)와 똑같은 눈높이입니다. 파노라마 창을 둬 개방감이 뛰어나다. 참, 망경루는 조선시대 제주에서 제일 큰 건물이었습니다. 


자, 이쯤 되면 김영수라는 이름이 궁금하실 거예요. 김영수 씨는 도서관이 있는 제주 북초등학교 20회 졸업생이에요. 1930년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가로 성공했죠. 1968년 어머니의 90회 생일을 기려 모교에 도서관을 신축해 기증했고요. 현재 김영수도서관의 시작이죠.


2019년에는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지금의 마을도서관으로 거듭났어요. 학교도서관이 마을도서관을 병행하는 건 드문 경우인데, 마을에는 아이들과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필요했죠, 제주도교육청(학교는 교육청의 재산이다)과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제주도가 재원을 댔다), 제주북초등학교와 학부모 및 마을이 고심했고, 건물을 다시 짓는 대신 김영수도서관을 리모델링했습니다. 



김영수의 이름으로...도서관은 비밀의 친구


현재 도서관은 이원화해 운영해요. 수업 시간에는 온전히 학교도서관으로, 방과 후와 주말에는 마을도서관으로 씁니다. 마을도서관으로 운영할 때는 여행자들이나 외부사람도 방문이 가능해요. 특히 김영수도서관에는 아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게시판이 많죠.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 있어요. 


도서관은 ( 000 )이다.

우리만의 쉼터, 우리만의 자랑, 책 천국, 천재, 행복의 공간····. 깨 씨의 낱알 같은 단어들이 눈가를 간질여 미소 짓게 해요. 가장 좋았던 정의는 ‘비밀의 친구’입니다. 그리 답한 아이는 어떤 책을 골랐을까요? 귀퉁이를 표 나게 접어 간직한 문장은? 비밀이 생겨난다는 건 나만의 세계가 탄생했다는 뜻일 텐데, 도서관을 기증한 고 김영수씨에게 이보다 보람찬 일은 없었겠습니다. 



김영수의 이름으로..도서관은 비밀의 친구


남향이라 방 안 깊이 온기가 스미는, 목관아가 보이는 책뜰에 자리잡기로 합니다. 먼저 온 마을 아이들은 푹신한 빈백(bean bag) 쿠션에 몸을 맡긴 채네요. 녀석들은 목관아 전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아요. 나 같은 여행자는 여행의 기분을 잃지 않으려 꼭 창가를 고집하지만요. 


그 사이 먼저 와 있던 한 소녀는 어느새 두 번째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들키지 않게 슬쩍 책 제목을 엿봐요. ‘하나도 안 떨려’(현암주니어). 이렇게 귀여운 제목이라니. 어떤 책인지 궁금해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합니다.



‘하나도 안 떨려’는 주디스 비오스트가 글을 쓰고 소피 블랙올이 그림을 그린 책입니다. 장기자랑하는 날,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조마조마하다가 점점 움츠러드는 ‘나’의 이야기죠. 주인공은 장기자랑을 잘 마칠 수 있었을까요?


 ‘끝까지 처음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며 자기가 한번 말한 것’을 실천하면 충분해,라고 김영수 할아버지가 남긴 말을 전해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야기의 끝을 궁금해 하며 소녀가 다음 책을 집어 들 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려요. 조금씩 기울어 가는 오후의 햇볕을 듬뿍 머금은 채로, 이곳은 소녀에게도 ‘비밀의 친구’일 테니까 하면서요.







『오늘의 읽만책과 내일의 문장』


  <하루 흔적 끄적이기>(제주북초등학교 6학년) 


제주북초등학교에서는 아주 특별한 책 몇 권을 집어들었습니다. 이곳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책들이죠. 제주북초등학교 학생들이 선생님과 만든 일종의 문집입니다.


 ‘제주 신화 이야기’는 교장선생님의 제주 신화 이야기를 듣고 글 또는 그림으로 쓴 감상문입니다. 4학년 양예준은 ‘인간차사 강림이’를 동생 예서에게 추천했어요. ‘예서는 나와 같은 생각을 잘하고 텔레파시가 통하기 때문’이라는 추천사가 정겨워 예준의 텔레파시는 우리 어른에게도 충분히 통한다고 말해 주고 싶네요


‘하루 흔적 끄적이기’는 제주북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이 쓴 일 년간의 수업 기록입니다.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닌’ 강혜진 선생님이 6학년 2반 아이들에게 건네는 편지로 끝을 맺어요. 


선생님은 예쁘고 고만운 너희에게 많이 표현해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해. 
누구만 예뻐한다고 오해할까 봐 마음을 숨기게 되고,
그래서 더 잘 해주지 못한 것 같고... 
더 많이 아껴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고 아쉬워" 

선생님은 편지의 마지막에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적어요. 그 이름들 끝에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 적고 있어요. 그 편지를 읽고 나니 왜 그이의 직업이 선생님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다른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책들이니 김영수도서관에 간다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입니다.






※ 이 글은 제가 서울신문에 기고 중인 박상준의 書行(서행)에서 일부 발췌 후 편집했습니다.    

※ 전문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seoul.co.kr/news/2024/02/02/2024020201400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