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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Feb 21. 2024

안성 보개도서관_1만 권의 만화책이 있다고요?

<미생>(윤태호/더오리진)


무릎 위에 아이를 누인 아빠가 책장을 넘기는, 
아득해서 따듯한 풍경들이 도서관을 덥힙니다. 
만화책특화도서관이라서? 그렇게만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 
꿈과 희망 이런 단어들이 
내일의 말풍선처럼 떠다니는 걸 본 듯했기 때문입니다.


[보개도서관 만화책방은 처음부터 '만화방' 인테리어를 염두에 뒀다 합니다.]


여기 아닌 어딘가로? 만화책방으로!


안성 보개도서관은 드라마 <악귀>의 촬영지여서 소개하는 건 아닙니다. 극중 염해상(오정세) 교수가 악귀에게 희생당한 도서관 사서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나오죠. 하지만 그보다는 힘을 빼고 부담 없이 머물며 아이처럼 낄낄거려도 좋은 만화책특화독서관인 까닭입니다. 


보개도서관은 지난 1996년 안성시립도서관으로 개관했습니다. 10년 후인 2018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도서관 3층에 책다락 만화책방이 생겨났습니다.(1층과 2층은 일반 도서관으로 운영해요) 어느새 소장 만화책만 1만 권이 넘어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만화책을 보러 도서관에 갑니다. 


만화책도 만화책이지만 넉넉하고 여유로운 운영이 긴장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침묵과 고요 대신 적당한 수다와 커피 한 잔은 허락합니다. 음악도 흐르죠. 그래서 부모와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책장을 넘기거나, 연인들이 손을 잡고 서가를 누비는 모습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럽습니다.(심지어 보드 게임도 가능해요) 


먼저 중앙 원형 서가에 들립니다. 반원의 책장은 책장을 빙 둘러 만화책이 빼곡합니다. ‘장관’이라거나 ‘오지다’거나 세대마다 환호를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도 환대의 마음은 똑같습니다. 원형 서가를 기준으로 왼쪽은 책다락 만화책방, 오른쪽은 독립출판 전시실입니다. 


[보개도서관 3층에는 독립출판 전시실도 있습니다. 전시실 열람석에서는 안성객사가 보입니다.]


다락방 연대의 비밀스런 공감


만화책방은 처음 조성할 때부터 만화방 인테리어를 염두에 뒀다고 해요. 까만색 2인용 의자와 음료를 놓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 등 영락없는 만화방입니다. 뒤편 좌석은 심지어 누워 책을 볼 수 있는 매트 소파입니다. 아빠의 무릎 위에서 아기가 눈을 말똥거립니다. 만화책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빠와 아이의 시선이 정겹습니다. 


서가 안쪽에는 다락방이 있습니다. 2층은 이미 소녀들의 아지트네요. 1층은 아빠와 딸아이가 마주앉아 경쟁하듯 만화책을 뒤적이고요. 이토록 다양한 세대가 하나의 공간 안에서 공통의 집중력을 발휘하다니. 실실 웃음이 나는 걸 왜일까요? 어쩌면 만화가 그리웠던 건 책 속의 이야기보다 비밀스런 공모의 연대감은 아닐는지요. 



활자로만 가득 찬 책은 진지한 동무지만, 때로는 만화처럼 개구진 친구들이 갑갑한 일상의 숨통이 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전 어른들은 만화를 위험한 독서로 규정했던가요? 


도서관이 있는 보개(寶蓋)의 지명은 ‘보물이 덮여있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호호 입김을 불며 군고구마 껍질을 벗기듯 한 장 한 장 만화책을 넘기는 행복감은 이 겨울, 이 곳만의 보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라면의 불량과자 같은 수프 향처럼, 벽난로를 붉게 그을리는 장작의 불꽃처럼, 겨울의 느린 걸음이 닿고 싶은 여행의 풍경이 있는 만화의 전당, 2월이 가기 전에 안성 보개도서관에 한 번 들러보세요. 




오늘의 읽책과 내일의 문장』


  <미생>(윤태호/디오리진)

[미생, 슬램덩크, 무빙... 보개도서관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추억의 만화로 가득합니다]


보개도서관 만화책방을 나오기 전, 한 권의 만화책이 불러 세웁니다. 윤태호 작가의 ‘미생’입니다. 드라마로도 유명하죠. 책점을 치듯 눈을 감고 우연의 장을 펼칩니다. 80수(화)의 에피소드네요. 퇴근 전 장그래가 사장이 건넨 조언을 떠올리는 장면입니다. 서서 읽습니다. 

허겁지겁 퇴근하지 말고
한 번 더 자기 자리 뒤돌아보고 퇴근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거야.


상사의 조언은 적당히 읽어 넘기겠는데 ‘허겁지겁’이라는 단어에 꽂히고 맙니다. 새해에는 늘 지난 한해가 ‘허겁지겁’ 지나온 것만 같죠. 그래서 한층 매섭게 자신을 몰아세워요. 그 결과로 새해의 계획은 늘 거창한 것일지도 몰라요. 


도서관을 나올 때는 이미 해가 기울었지만 허겁지겁 걷지 않습니다. 나를 조금은 응원하기로 합니다. 천천히 가도 괜찮아, 하고 말이죠. 주차장 한가운데 서서는 뒤를 돌아보는 여유도 갖습니다. 다시 보니 도서관 지붕은 누군가 건물 위에 읽던 책을 펼친 채로 얹어 놓은 모양입니다. 심지어 그 옛날의 ‘보물섬(80~90년대 만화잡지다)’처럼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섬 위에 말풍선 하나를 그려 적습니다.


‘잘 살았어.’


지난 2023년의 내게 꼭 한 번은 해주고 싶었던 말입니다.






※ 이 글은 제가 서울신문에 기고 중인 박상준의 書行(서행)에서 일부 발췌 후 편집했습니다.    

※ 전문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seoul.co.kr/news/life/travel-news/2023/12/22/2023122201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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