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풍화>(조성룡/수류산방)
여행이 일이 될 때,
그건 직장에서 엑셀 파일을 정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날은 출장길에서 비켜나 가까운 도서관에서 쉬어 갑니다.
이곳은 부산 수영구 망미동 F1963 도서관입니다.
일이 조금 늦어지면 어때요?
사람이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부산 F1963 도서관은 고려제강의 문화재단1963에서 운영하는 예술전문도서관입니다. F1963은 고려제강 수영공장을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이죠. 공장(Factory)의 ‘F’와 공장이 문을 연 1963년을 따와 이름 붙였습니다. 리모델링은 2023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이었던 조병수 건축가가 맡았습니다.
F1963은 2016년 개관 초기부터 꽤 소문이 났으니 여행 좋아하는 이들은 한 번쯤 들어 본 이름일 테죠.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거기에 도서관이 있었어?’ 하고 반문합니다.(yes24중고매장과는 다른 곳입니다) 도서관에 들어서서는 또 ‘이런 도서관이 있었어?’ 하고 감탄합니다.(테라로사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정작 F1963 도서관 입구는 단출하고 소박합니다. 도서관 앞 달빛가든에 기댄 작은 문이겠거니 합니다. 작은 문틀 너머로 이토록 근사한 세상이 열릴 거라 기대하는 이는 많지 않아요. 참, 곧장 들어서지 못하는 건 입간판 아래 볕을 쬐는 ‘호랑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도서관 사람들은 얼룩무늬 길고양이를 그리 부릅니다.
F1963도서관의 서가는 건축, 음악, 미술, 사진 네 가지 주제로 나뉩니다. 일반 도서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희귀서와 원서들이 눈길을 끈다. 예를 들면 1939년 270부 한정 발행한 ‘앙드레 쉬아레스: 파시옹 조르주 루오’(Andre Suares: Passion Georges Rouault)나, 2013년 1000부 한정으로 재발간한 피카소의 전작 도록 ‘피카소 카탈로그 레조네’(Picasso Catalogue Raisonne) 같은 책들이죠.
안내 데스크에 요청하면 사서가 장갑을 끼고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넘기며 보여 줍니다. 안쪽에는 음악이나 공연 DVD 등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있고요.
회원제로 운영되는 점 역시 특이합니다. 회원은 연회비 10만원, 비회원은 입장료 5000원을 내고 3시간 동안 이용해요. 저는 여행자이니 입장료를 냅니다. 도서관에 무슨 입장료일까 싶겠지만 커피 한 잔 값으로 건축가가 지은 나만의 서재를 가지는 경험은 제법 근사합니다.(텀블러나 테이크아웃 커피 반입은 가능해요)
대신 30명 입장 제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요하고 편안하게 머뭅니다. 타인의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애타는 서두름은 잦아들죠. 꼭 책을 읽지 않아도 좋아요. 음악과의 공명만으로 충분합니다. 회원제와 입장료로 적정 인원을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오히려 다행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If you have a garden and a library, you have everything you need.”
도서관을 나서기 전, 프론트에 적힌 로마의 정치인이자 작가 키케로의 글을 뒤늦게 발견합니다. ‘도서관과 정원만으로 삶은 충분하다’, 제게는 이렇게 읽혔습니다. 비록 자연이 움츠러드는 계절이기는 하나 겨울 정원은 앙상한 그대로 살아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도서관을 나오는 길에는 화단의 로즈메리를 한 움큼 쥐었다 폅니다. 달큼하고 상큼한 향이 콧등에 얹히네요.
그러니 달빛가든도 꼭 들러보세요. F1963 도서관을 나서면 바로 마주하는 정원이에요. 식물원 온실이라 불리는 맞은편 ‘그린 하우스 앤드 북’에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수(水)정원까지 잇는 구간입니다. 짧은 길이지만 겨울에도 식물과 생명의 감흥이 짙어 아주 잠깐이나마 도심을 잊습니다.
수정원 정자는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방을 디자인한 최욱 건축가의 솜씨입니다. 지붕과 와이어로 이뤄진 정자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므로 아름답습니다. 도서관 프론트에서 본 키케로의 문구는 그렇게 달빛가든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듯합니다.
<건축과 풍화>(조성룡/수류산방)
서가를 서성이며 '읽다말 책'을 찾습니다. 읽다말 책은 읽고 싶은 만큼만 읽는 게 원칙입니다. 완독은 불가. 보통 30분 30페이지 정도를 읽습니다.
오늘은 ‘건축과 풍화’(수류산방)입니다. 조성룡 건축가와 심세중 편집장의 대담을 엮은 책입니다. 선유도공원, 이응노의 집, 의재미술관 등 조성룡 건축가의 건축은 땅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아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더 반가웠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질문에 정답(correct answer)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응답(response)하는 일, 응답으로 질문을 이어 나가는 일이 아닐까?”
타로카드처럼 무턱대고 펼쳐 든 페이지 속 문장 하나를 채록합니다. 책을 읽고 여행을 하는 것 또한 같은 태도여야 할 것입니다. 온전히 채워진다고 완전해지는 건 아닐 테죠.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12월의 끝에서 다시 1월로 돌아가는 것이겠죠.
※ 이 글은 제가 서울신문에 기고 중인 박상준의 書行(서행)에서 일부 발췌 후 편집했습니다.
지면에 실지 못한 내용을 일부 추가했습니다.
※ 전문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40202014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