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황인찬/문학동네)
눈을 뜨니 토기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인제에는 유독 탐스러운 책 공간이 많아요. 인제 기적의도서관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소양강을 품은 인제스마트복합쉼터의 책쉼터, 동국대 만해마을 북카페 깃듸일나무, 그리고 큐레이션이 인상깊었던 책방 나무야! 인제 책방 3대장이라 불러봅니다.
봄날의 책 여행으로 코스를 꾸려도 손색 없는 곳들이에요. 특히 이들 책방 중 일부는 인제 기적의도서관처럼 건축 공간을 같이 경험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아직 다녀오시지 않았다면 이제 소개할 장소들과 봄날의 책 여행 꾸려보셔도 좋겠어요.
먼저 인제스마트복합쉼터입니다. 이름만 듣고는 첨단 스마트 시설을 갖춘 쉼터를 떠올릴 테지만 아날로그적인 전망 쉼터입니다. 인제로 들어서는 소양호 옆 설악로(44번 국도) 변에 있어요. 기존 기념품 판매장을 책방과 전망대 중심으로 리모델링하고, 그 곁에 새 판매장을 지은 두 동의 쉼터입니다.
인제스마트복합쉼터는 ‘2022년 젊은 건축가상’을 (공동) 수상한 김효영 건축가가 디자인한 재미난 건물입니다. 나풀나풀 곡선미를 자랑하는 판매장의 콘크리트 지붕과 각기 다른 생김의 기둥 등이 흥미로워요. 건축을 모르는 사람들도 재미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요소가 많아요.
물론 전망대에서 보는 소양호 풍경이 압권이죠. 책쉼터 옆 2층 테라스에서도 볼 수 있고, 3층 옥상 전망대에서도 볼 수 있어요.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는 것도 재미나요. 전망대 꼭대기에 간당간당해 보이는 황동욱의 설치 작품 ‘스톤 로그 시리즈’ 등도 눈길을 끌죠.
특히 책 좋아하는 이들은 2층 무인 책쉼터를 조심해야 합니다. 책 구성이 예사롭지 않은 까닭에 체류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기 쉬워요. 휴게소 같은 쉼터라 잠깐씩 머물다 가는 걸 고려해서 시집, 그림책, 에세이 등을 비치했는데요. 최근 화제를 모은 책들도 많아요. 물론 책쉼터 역시 창밖으로 소양호 전망이 빼어나답니다.
인제스마트복합쉼터의 책 큐레이션은 아무리 봐도 관공서에서 한 것 같지 않았어요. 이건 분명 전문가의 시점과 손길이 작용했다 싶었죠. 그 비밀은 인제 기적의도석관에서 약 500m 거리에 있는 책방 ‘나무야’에서 풀렸어요.
동네책방에서 책을 사는 건
당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일이에요.
책방 나무야는 건물 2층에 있어요. 계단을 올라설 때 한미화 출판평론가의 글귀가 반깁니다. <동네책방 생존 탐구>(혜화1117) 등을 쓰신 분이죠. 책방의 다채로움과 녹록하지 않은 현실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던 책이라 기억해요(제 아내가 표지를 그렸다는;;)
책방 문을 열고 들어가 서가를 살핍니다. 나무야의 큐레이션은 뭐랄까요, 과하지 않지만 소소한데 알차요. 다양한 선택의 폭을 열고 추천해요. 책과 짝을 이룬 몇몇 굿즈 선물도 탐나더군요. 인제스마트복합쉼터의 큐레이션이 예사롭지 않았도 말씀드렸더니 나무야에서 했다고 하시네요.
‘블라인드 데이트북’처럼 책표지를 가려 우연에 기대는 형식도 있어요. 책을 구입하면 아메리카노 쿠폰 1장을 선물로 줍니다. 책방 창가에는 커피 한 잔 하며 조용히 책을 읽기에 좋은 자리가 있고요. 인제에 가신다면 놓치지 마세요.
하루를 묵어가시겠다면 동국대 만해마을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인제를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한 분이 만해 한용운 선생이죠. 인제 백담사는 만해가 정식 출가한 고찰이고요. 동국대 만해마을은 백담사 가는 길 북촌 변에 있어요. 동국대학교에서 만해 선생을 기려 지었어요.
불교 사찰 건축을 상상하실 테지만 현대적인 분위기에요. 건물은 노출 콘크리트가 주를 이룹니다. 불교에 조예가 깊은 건축가 김개천이 설계했어요. 절제된 고요와 침묵의 힘이 느껴진는데 20년 전에 지어진 건축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만해마을 숙박은 북카페, 서원보전, 만해한용운박물관 등 산책하다 머물만한 장소가 많아 좋아요. 숙소동 문인의 집 맞은편에는 북카페 ‘깃듸일나무’가 있어요. ‘깃듸일’은 만해의 시 ‘생명’ 속에 나오는 시어 ‘깃들일 나무’에서 딴 이름이죠. 새가 깃을 접고 쉴 수 있는 나무라니요.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과 편백나무 프레임이 편안한 쉼터를 연출합니다. 책은 지난 책들이지만 확실히 나무 공간의 힘이 있어요.
참, 서원보전은 만해를 기리는 법당인데요. 1층 필로티를 통과해 2층 측면 입구로 들어서요. 법당이라지만 여느 사찰의 대웅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불상이 있는 동쪽만 창틀의 격자 프레임을 달리해 눈길을 끌어요. 그 너머로 솔숲의 초록 음영이 어리는데 마치 명상 공간처럼 보이죠.
동선은 인제에 들어오시거나 떠나실 때, 인제스마트복합쉼터에 들리시고요. 읍내에서 인제기적의도서관과 책방 나무야가 가까우니 연계해 돌아보세요. 만해마을은 콕 박혀서 슬렁슬렁 보내고 싶다 할 때 좋요. 만해마을 내 책방 외에도 걸어 산책할 만한 거리에 여초서예관, 한국시집박물관 등이 있어요.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황인찬/문학동네)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황인찬/문학동네)
앞서 인제스마트복합쉼터는 책 좋아하는 분들이 조심해야 한다 말씀드렸죠. 네, 생각보다 꽤 오래 머물고 말았는데요. 강변의 황홀한 풍광을 바라보며 책장을 넘기고픈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죠.
소양호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내키는대로 펼친, 시집 한 권에 기어이 눈으로 밑줄을 치고 맙니다.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라는 황인찬 시인의 시집입니다. 책장을 넘기자 시인의 말이 보입니다.
당신이 먹으려던 자두는
당신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집의 첫 번째 시는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함’이에요. 짧은 시입니다. 이런 시에요.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하자
학교에서 봐
곧장 짐 자무쉬의 영화 ‘패터슨’이 떠올랐어요. 영화 속에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 ‘다름 아니라 This is to say’가 나와요. ‘냉장고에 있던 자두를 내가 먹어버렸어’로 시작하는 시죠. 일상의 작은 사건을 위트 있게 표현한 시라 유독 좋아했거든요.
시인의 말과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함’을 읽고나서 분명 황인찬 시인도 이 영화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그리고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는 표제시여서 그런지 기억에 남은 시입니다. 특히 마지막 시구가 좋았어요.
눈을 뜨니 토기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잠시, ‘하늘 아래 흔들리고 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토끼풀 같은 삶’을 살아온 시 속 화자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어느새 3월의 절반을 넘어가네요. 내 마음이 봄을 기다리는 설렘인지 겨울을 보내는 아쉬움인지는 나조차 알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슬슬 봄이 오나‘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