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7._롱블랙 : 해녀의부엌
해녀의부엌이 주목받는 건 이전까지 해녀 콘텐츠와 달리, ‘해녀의 물질’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닌 ‘해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입니다.
※'플랫화이트X어제의롱블랙'은 구독서비스 롱블랙(www.longblack.co)의 노트 가운데 ‘공간과 스토리가 있는 콘텐츠’를 선별해 여행작가의 시점으로 블렌딩합니다. 롱블랙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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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의부엌 : 연극이 된 제주 해녀의 삶, 잊지 못할 해산물 다이닝을 창조하다
저는 <구석구석 제주올레길>과 <다른 제주에 가다> 두 권의 제주 여행 책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로컬 제주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세 가지가 ‘오름’ ‘제주사투리’ 그리고 ‘해녀’라고 느꼈습니다. 오름은 이미 발견된 콘텐츠이고, ‘제주사투리’는 언젠가 발견될 콘텐츠라면, 해녀는 지금 주목받을 만한 콘텐츠가 아닐까 해요.
지난 5월 17일 롱블랙은 제주 ‘해녀의 부엌’이었어요. 무척 반가웠습니다. 해녀의부엌은 제주 해녀 콘텐츠의 혁신입니다. 저는 ‘해녀의 부엌’을 2020년 10월에 처음 방문했습니다. 이전에도 예약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때도 이미 예약하기가 만만하지 않았어요. 미리 말씀드리면 저는 가성비에 예민한 편입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날 때 즈음에는 저도 모르게 뿔소라 5kg을 주문하고 있었어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공연과 식사였거든요.
해녀의부엌은 ‘제주 해녀 다이닝’이라 소개합니다.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면 ‘극장식 레스토랑’입니다. 예약제고 지정석입니다. 1부는 ‘연극 & 해산물 이야기’에요. 먼저 해녀의 삶을 다룬 20~30분 분량의 ‘해녀 연극 공연’이 있어요. 연극이 끝나면 현직 해녀가 나와 ‘해산물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줍니다.
2부는 ‘식사 & 해녀 인터뷰’입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해녀의밥상’으로 식사를 해요. 톳밥, 군소무침, 전복물회, 갈치조림, 돔베고기 등 해녀들이 물질로 캐거나 요리한 음식이 차려집니다. 식사 후에는 해녀 인터뷰 시간이 있어요. 연극에 등장한 최고령 해녀 할머니가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사투리를 섞어 질문에 답합니다. 통역이 필요할 때도 있어요. 총 러닝 타임은 2시간 30분입니다.
롱블랙은 해녀의부엌 김하연 대표를 인터뷰해 기획의 출발과 발전 과정을 들려줍니다. 김 대표는 제주 토박이예요. 한예종에서 연기를 전공했고, 연기를 통해 아동심리치료를 하기도 했어요. 해녀의부엌은 김 대표가 어머니의 사업을 도우려던 게 계기였어요. 제주 해녀가 캔 해산물이 헐값에 일본으로 팔려나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주 해산물을 브랜드화하기 위해 '해녀의부엌'을 구상하게 된 거죠. 자신이 전공한 연기를 통해서요. 그리고 연극 안에 제주 해녀의 '담대한 정신'을 담고자 했다 말합니다.
롱블랙 인터뷰는 그 담대한 정신이 어떻게 세상과 만나는지, 김하연 대표의 목소리로 마무리해요.
트렌드는 인간이 가진 무의식이 세상과 만났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잖아요. 진짜 같지 않은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어요. 그들을 자극하지 않았나 싶어요.
‘트렌드는 인간이 가진 무의식이 세상과 만났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그 현상은 ‘진짜 같이 않은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를 말하는 것일 테고요.
☞ 롱블랙에는 없는 이야기
롱블랙에는 없는 해녀의 부엌 이야기를 좀 더 할게요. 해녀의 부엌을 보고 나서 제 머릿속는 세 장면이 남았습니다. 첫 번째는 앞서 말한 뿔소라를 구매한 ‘사건’입니다. 1부 공연이 끝나고 식사를 할 때 두 장의 종이가 전해져요. 첫 번째 종이는 뿔소라 주문서였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저는 무언가에 홀린 듯 주문서를 작성하고 있었어요. 아마 해산물의 신선도나 품질의 우수함이 아니라 ‘해녀의 이야기’가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일 거예요.
그건 두 번째, 세 번째 장면과도 연결이 됩니다. 두 번째 장면은 두 번째 종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극중 배우이기도 한, 최고령 할머니에게 건네는 질문지였어요. 관객들이 질문을 적어내면, 그걸 바탕으로 마지막 순서, 할머니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모든 공연을 마치게 됩니다.
할머니와의 인터뷰 시간이 신기했던 건, 그날 찾은 이들의 질문이 대부분 할머니에 대한 감사와 애정의 고백으로 시작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건강하셨으면 좋겠고, 남은 생은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사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응원이었어요. 어떤 질문지는 질문 없이 할머니에게 건네는 간절한 안부로 끝이 나요. ‘진정성 있는 이야기’가 마음을 움직인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장면은 공연 가운데 있습니다. 공연은 전문 배우들이 출연해 연기하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최고령 할머니가 딱 한 번 나옵니다. 할머니는 짧은 대사 한 줄을 뱉고는 사라지세요. 그런데 할머니가 등장하자, 저를 비롯한 관객들은 모두 감동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습니다.
할머니의 분량은 극히 일부입니다. 연극은 배우들이 이끌어가요. 하지만 할머니는 단 한 장면만으로 주인공이 됩니다. 할머니는 대사나 몸짓으로 연기하지 않습니다. 얼굴 가득한 주름이 연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건 인생이 인생을 연기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할머니 육성을 드는 순간 울컥하던 감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주 해녀를 콘텐츠화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어요. 우선 제주 대표 맛집으로 각 지역마다 있는 해녀의집이 소개되었죠. 제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해녀의집’은 하나의 제주 미식 브랜드입니다.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지금도 그 명성은 유효해요. 성산일출봉 옆 우뭇개에서는 해녀들이 물질을 시연하는 ‘해녀물질공연’이 있습니다. 성산어촌계 소속 해녀 100여 명이 10개조로 나뉘어 물질 시범을 보여요. 직접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고 물질 후에는 기념촬영도 해요. 물론 해산물도 판매합니다.
대평리에서는 매년 여름이면 ‘난드르올레 좀녀 해상공연’이 펼쳐져요. 바다 위에 테우(뗏목)를 띄우고 마을 해녀들이 그 위에서 노동요 공연을 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는 참가자들과 한데 어울려 춤도 추고요. 심지어 성산에 위치한 아쿠아플라넷 제주는 대형수족관에서 제주 해녀가 물질을 시연합니다. 물질 후에는 관객들과 짧은 인터뷰도 가지고요.
각각의 프로그램은 저마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해녀의부엌이 주목받는 건 이전까지 해녀 콘텐츠와 달리, ‘해녀의 물질’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닌 ‘해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가 어쩌면 다음 세대 해녀가 될 수도 있었던 제주 여성이고요.
김하연 대표는 제주사람이고 육지에서 연기를 공부했습니다. 해녀는 김 대표의 엄마와 할머니, 이웃들의 삶입니다. 김 대표는 그 고단한 삶을 구석구석 마주하고는 해녀의 삶을 물 밖으로 끄집어낸 겁니다. 다음 세대의 제주 여성이 이전 세대의 제주 여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녀의 인생은 궁색한 신파가 아니라, 한 여성의 온전한 삶의 이야기로 완성이 되는 거고요.
한편 제주 여성의 서사는 제주의 서사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해남들도 많았습니다. 잠수는 남녀의 구분이 따로 없었어요. 그런데 나라의 공납이나 부역이 심해지면서 제주를 탈출하는 남성들이 늘어나요. 또 어선을 타고 나갔던 남성들 가운데 바다에서 죽는 이가 많았어요. 자연스레 여성들이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래서 제주 여성은 억척스럽고 강인하다 합니다. 오죽했으면 ‘딸 나믄 도새기 잡앙 잔치하곡 아덜 나믄 발질로 조롬팍 찬다(딸 낳으면 돼지 잡아 잔치하고 아들 낳으면 발길로 엉덩이 찬다)는 제주 속담까지 생겼을까요?
진정성은 진정성이 있다고 반드시 전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해녀의부엌’은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연극이기도 하지만, 연극을 통해 해녀들을 치유하는 씻김굿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해녀의부엌'을 본 날, 최고령의 해녀 할머니가 ‘물질 안 하고 돈 벌어서 좋다’하셨던 말씀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해녀의부엌’의 진정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2020년 10월 이후로, 해녀의부엌을 꾸준히 응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입소문 내는 것도 잊지 않고 있지요.
※ 해녀의부엌은 '해녀이야기(본점)’와 ‘부엌이야기(북촌점)’에 따라 연극 구성과 내용이 달라집니다. 저는 제가 본 본점의 해녀이야기를 중심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