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한 번뿐이다"
실존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키르케고르의 출발점은 헤겔에 대한 반동이었다. 곧, 실존철학은 헤겔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시작된다. 여기에서 실존철학이 거부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나의 삶이 아닌 남의 삶을 사는 일에 대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을 비판함에 있어 효과적인 전략을 취했는데, 그는 헤겔의 이야기에 다 동의하면서 언제나 마지막에 이 한 가지만을 물을 뿐이었다.
"그래, 너무나 좋은 이야기인데, 너의 이야기는 어디 있니?"
"네 말대로 되면 참 아름다운 세상이겠다. 그런데 어째서 그 세상에 너는 안 살고 있니?"
"다 있는데, 왜 너만 없니?"
키르케고르의 입장에서 볼 때, 헤겔의 기획은 보편적 정신을 전면에 내세워, 그 자신이 개별자라는 사실을 거듭 망각하려는 기만이었다.
이처럼 개별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성취하고자 하는 현실은 곧 유한성을 거세하려는 현실이다. 우리의 개별성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이해하면 이 유한성을 억지로 소외시키려는 기만의 의도는 명료해진다.
그것은 바로 몸이다. 개별성은 이미 서로 다른 각자의 몸에 기인한다. 그리고 몸은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유한성의 이유다. 우리는 몸으로 인해 활동이 제한되어 있고, 몸으로 인해 결국에는 죽게 될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유한한 것이고, 또 반드시 필멸할 일회적인 것이다.
때문에 개별자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몸을 무시하려는 의도며, 이는 곧 죽음을 무시하려는 의도다. 그렇게 죽음을 무시하면 죽음이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또는, 몸 대신에 보편적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몸보다 탁월하게 상정되는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어 놓고, 우리가 몸이 아니라 바로 그 정신이라는 식으로 담론을 구성하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결국 여기에는, 헤겔의 '불멸하는 추상적 정신'과, 키르케고르의 '한 번뿐인 구체적 몸'의 대립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대립이 아니다. '불멸하는 정신'은 이미 '나의 정신'이 아닌 까닭이다. 그것은 보편자의 정신이고, 집단 및 공동체를 대변하는 군집의 정신이며, 곧 '남의 정신'이다.
때문에 보편적 정신이 죽음 속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나라고 하는 개별자는 언제나 몸과 함께 죽는다. 나는 몸 그 자체인 까닭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를 "나는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몸이다."라는 탁월한 진술로 묘사한다.
결국 이렇게 보자면, 키르케고르는 끊임없이 헤겔에게 죽음을 상기시키고자 한 것이다. 아무리 보편적 정신의 불멸성을 떠들어봐도, 또는 정신을 통한 자연[몸]의 합일적 구원을 설파해봐도, 헤겔의 몸으로 존재하는 그 개별자가 죽는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이 사실을 실존철학자들보다 조금 더 일찍 발견했던 이가 바로 붓다다.
"나는 죽는다. 죽는다는 것은 나의 일이다. 아트만[정신/영혼]이 불멸한다고 해도, 반드시 나라고 하는 이 몸은 죽는다. 지금 이 삶에서 이 몸으로 존재하고 있는 나는 기필코 사라진다."
이것은 붓다의 가장 탁월하고, 가장 정직한 통찰이었다.
그래서 붓다는 결국 실존철학자들처럼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바로 "나는 고유하다."라는 사실이다.
지금의 이 몸으로 존재하는 나는 결코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시공 속에서 오직 단 한 번뿐인 것이다. 이 대체불가능성, 이것이 바로 고유성의 정확한 의미다.
키르케고르는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이 존재방식은 대체불가능한 것이며, 대체불가능한 이것이야말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핵심적인 특성을 고유성이라고 표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유성은 오직 주관적인 삶 속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주관성은 관계로부터 단절된 고립을, 곧 자기 안에 갇힌 자폐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는 단순하게 객관성의 반대어를 의미하는 것이 또한 아니다.
헤겔주의자들은 키르케고르의 주관성의 개념을, 상기한 방식으로 매우 빈번하게 오독하곤 한다. 그러나 정신이라고 하는 자기 안에 갇힌 자폐성과, 모든 것을 그 보편적 정신의 이름 아래 평정하고자 하는, 이른바 주관의 객관화를 통한 폭력성은, 실제로는 헤겔주의자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가장 핵심적으로,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주관성은 바로 '내가 내 자신과 맺는 관계성'이다. 키르케고르가 "내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내 자신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라."라는 것이며, 이는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사랑하라."라는 의미다.
결코 대체될 수 없는, 가장 개별적이고, 가장 일회적이며, 가장 고유한 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이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삶'
이것은 실존철학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이와 유사하게, 붓다 또한 그의 마지막 유언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自燈明)."
결국 주관성이라고 하는, 자신과의 사랑의 관계성 속에 모든 진리로서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보편적 정신이 아니다. 집단의 힘이 아니다. 객관적 구조가 아니다. 오직 주관성 속에서만 우리의 삶을 밝혀줄 의미가 개방될 수 있다.
실존철학과 현상학, 그리고 오늘날의 해석학으로 알려지는 사상사의 전개는, 바로 이 개별성의 고유한 의미를 더욱더 담보해내려는 방향성을 갖고 성립되어 왔다. 타자철학은 또한 정확하게 이 고유성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 바로 타자다. 그리고 이 몸으로 드러나 있는 나도 바로 그 타자다.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의미다.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은, 임의적인 부품처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고유성을 담지한 개인을 묘사하는 영단어는 'individual[나누어질 수 없는]'이다. 개인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나누어질 수 없는 '통짜(wholeness)'다. 그래서 개인은 서로 다른 그 자체로 이미 '온전한 것(wholeness)'이다.
실존철학에서,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것의 실제적인 의미는, 스스로를 이 온전한 것으로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발견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것처럼 오롯한 주관성의 체험으로만 가능하다. 이는 아주 단순하게, 스스로의 온전함에 대한 발견은, 지금 스스로의 몸을 사랑하는 일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실존의 정반대편에 서있는 개념은 바로 구조다. 이 구조는 헤겔주의를 대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구조는 아주 단순하게는, 개별적인 몸을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다른 것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개별적인 몸보다 더 큰 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소위 말해, 구조는 군집의 논리다. 집단주의의 정서며, 공동체주의의 의지고, 통합주의의 열망이다. 보편적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더 큰 '추상적 몸'을 만들면, 이를 통해 개별적인 몸의 유한성과 필멸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고유한 나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으로 도피하고자 하는 것이 곧 구조다.
그래서 구조의 논리 속에서는 사실 전부 다 대체될 수 있는 개체들만이 묘사된다. 중요한 것은 전체의 구조이지 내가 아니다. 그리고 그 구조가 지향하는 보편적 인간상이 중요하지, 지금 여기의 구체적 나는 중요하지 않다.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 입각할 때, 나는 보다 높은 보편적 지성으로 진화되어야 할 미완의 과도기적 존재일 뿐,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온전하지 못한 존재다.
여기에서 구조의 핵심개념이 무엇인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지성이다. 헤겔의 보편적 정신에서 결국 정신의 핵심으로 강조되는 것 또한 이 지성이다. 그리고 이 지성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구조에 대한 열망이 된다. 하나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통합적 구조를 구상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가장 탁월하고자 하는 지성의 제일 큰 소망이다. 자신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 복잡한 구조의 퍼즐을 원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구조와 지성은 서로를 되먹여주는 상호의존적 개념이다.
가장 개별적인 것들을 가장 보편적인 규칙으로 하나의 프레임 속에 잡아 가두는 통합주의는 구조의 꽃이다. 이 통합주의는 가장 탁월한 지성을 통해 가능한 것으로서 상정된다.
헤겔이 그러하고, 브라만교의 아트만사상이 그러하며, 헤겔의 뉴에이지영성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켄 윌버가 그러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지성의 진화를 말한다. 그렇게 가장 진화된 보편적 지성이 이루게 되는 현실을 유토피아라고 묘사하며, 이 지성의 진화가 마치 인간의 임무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구조적인 당위로 설명된다. 이 삶의 모든 구조가 이 보편적 지성의 진화를 위해 작동한다고 말하는 식이다.
이러한 사유가, 실상 히틀러를 위시한 제국주의적 사유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은 더는 새로울 것이 없다. 이것은 헤겔에 대한 현대철학의 비판들을 통해, 그리고 윌버에 대한 인본-실존심리학의 비판들을 통해, 또 전체주의에 대한 윤리적 비판들을 통해, 그리고 브라만교에 대한 붓다의 비판들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대단히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지성을 최고의 가치로 두며, 그 보편적 지성을 통해 불멸성을 획득하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이 기획은, 결국 전체주의를 낳는다. 말은 통합주의라고 쓰지만, 실제로는 전체주의라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개별성을 소외시키고, 즉 인간의 구체적인 몸을 소외시키고 이루는 현실은 언제나 집단적 폭력과도 같다.
이 집단적 폭력에 노출되어 죽음에의 두려움을 크게 느낀 이가, 그 자신 역시도 이러한 전체주의적 기획을 품게 된다는 사실 또한 조금도 놀라울 것이 없다. 이것은 패싸움의 논리인 까닭이다.
이를 묘사하자면 이러하다. 자신이 개별자라서 집단 앞에 취약함을 느끼게 된 개인은, 결국 다른 집단을 구성해 힘을 얻으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구성한 집단은, 기존에 자신에게 박해를 가했던 집단보다 더욱 유능한 기능성과 도덕성을 담보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집단은 개인에게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에게 좋은 것으로서, 그 집단이 유지되어야 할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결국 이 구조와 지성의 논리는,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논리인 셈이다. 패거리가 있으면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 패거리 속에 합일되어 불멸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 구조와 지성의 논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집단은 모든 개인에게 원래 폭력적이다. 모든 보편자는 모든 개별자에게 원래 폭력적이다.
실존철학은 바로 이 사실을 명확하게 전한다. 곧, 집단적 구조를 강조하는 보편적 지성주의가 결코 개별자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집단이 개인을 보호하고, 보편이 개별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실존의 의미는 가장 크게 위협받는다.
그 이유는, 역으로, 개인이 집단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고, 개별이 보편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며, 실존이 구조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보편에게 있어 개별은, 보편이 맞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하나의 사례다. 그러나 단 하나의 개별만 보편적 법칙에서 어긋나도, 그 보편은 더는 보편일 수 없게 된다. 모든 권위가 무너져내린다. 이와 같다.
실존철학에서, 특히 카뮈나 베르자예프가 제안하는 반항의 개념은, 바로 이 개별자로서의 반항이다. 구조의 권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구조라는 것 자체가 지성이 만들어낸 공허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포이어바흐을 통해서도 잘 지적된다. 포이어바흐가 볼 때 이러한 모습은, 자신이 유한한 몸의 존재라는 사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성을 통해 만든 가상의 구조에 구원을 위탁하고, 그것을 사실인 것처럼 믿으며 세상을 경영하려고 하는 것이다. 즉, 실제로는 자신의 주관을 투사해 만든 것을 보편이자 객관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기에 의한 자기숭배다. 곧, 자기우상화다.
포이어바흐가, 보편적 지성이 만드는 이 자기우상화의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실존철학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지성의 자기우상화를 비판한다. 그래서 실존철학은 반지성주의 철학으로 불리곤 한다. 이 말은, 실존철학이 무식하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신격화 작용을 경계하며, 지성의 한계를 명확하게 하려는, 소크라테스의 건강한 회의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성의 가장 명확한 한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성이 아무리 대단한 것처럼 날뛰어도 그 적용은 나라고 하는 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나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자예프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의 삶이 아닌 것은 철학할 수 없다."
이 말은, 나의 삶과 죽음 밖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지성은 없다는 의미다. 즉, 역으로 말하면, 지성은 아무리 그 탁월성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삶과 죽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아무리 보편적 지성의 담지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이처럼 당연한 이야기를, 구조와 지성이 만들어내는 통합주의는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당연한 이야기에 대한 상기는 더욱 노골적인 반동으로 실존철학을 통해 수행된다.
키르케고르도, 니체도, 하이데거도, 야스퍼스도, 마르셀도, 사르트르도, 베르자예프도, 두르젠도, 스피넬리도, 슈나이더도, 콘도, 이처럼 실존적 사유의 지평 위에 서있는 모든 이는 이 당연한 이야기를 거부하는 보편적 지성에 반동한다. 이들은 헤겔에게 물은 키르케고르처럼 보편적 지성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나는 반드시 죽는데, 내 삶과 죽음에 아무 영향도 못 미치는 보편적 지성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이것이 실존적 정직성(authenticity)이다. 실존은 삶과 죽음 앞에 정직한 것이다. 그 사건이 오롯하게 나의 주관성으로만 포섭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사실에 정직한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지성을 모든 것의 핵심으로 상정하는 구조적 통합주의자들은 정직하지 않다. 그들은 지성의 영원성과, 보편적 집단정신의 불멸성을 믿는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 하나의 신앙에 가깝다. 이른바, 지성주의교다. 그 교리는 이러하다.
"탁월한 지성을 갖게 되면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이는 헤겔, 브라만교, 윌버 등에게서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는, 집단에 의해 위협받는 개별자의 몸에 의해 암시된 죽음의 징조 앞에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된 이가, 자신의 지성을 조작적으로 활용해 그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집단을 형성하려는 의도를 통해 보이게 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편적 지성의 담지자처럼 행세하는 개인이 만든 그 어떤 집단 속에서라도, 그 어떤 구조 속에서라도, 그 개인은 죽을 때 혼자 죽는다. 일개의 개인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어떤 위대한 보편적 정신이라도 그를 불멸하게 하지 못한다. 그 어떤 정교한 통합적 구조라도 그를 영생하게 하지 못한다. 그 어떤 탁월한 진보적 지성이라도 그를 부활하게 하지 못한다.
그는 죽는다. 그는 반드시 죽는다. 그는 반드시 혼자 죽는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 앞에 모든 망상은 산산이 무너져내린다.
사실을 최대한 부정하려고 하는 구조적 통합주의자들은 특히나 비극적으로 죽게 된다. 죽기 바로 전까지 품고 있던 망상이 그의 죽음을 비극적으로 만든다.
보편적 정신과 같은 것은 없다. UFO나 유령만큼이나 없다. 우리는 헤겔주의나 브라만교, 윌버의 말처럼, 위대한 보편적 지성으로 진화하기 위해, 그리고 그 보편적 지성의 힘으로 유토피아와 같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자신이 제일 두려운 까닭에, 제일 높이 있는 왕이 되고 싶어하는, 즉 마치 구름 위에서 초탈한 구루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의 꿈일 뿐이다. 그렇게 지고한 지성적 존재가 되면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꿈일 뿐이다.
이처럼, 자신이 왕인 줄 아는 망상을 죽기 전까지 품고 있다가, 죽음 바로 직전에야, 자신이 평범한 일개의 개인이라는 사실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기에, 이 통합주의자들의 죽음은 비극적인 것이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아무리 열렬하게 영성의 영원성이니, 지성의 불멸성이니, 구조의 항구성이니 등을 말해봤자, 그들이 그렇게 치밀하게 조작해낸 언어들이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지는 못한다.
이는 언어로서 삶을 통제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즉, 언어를 통한 앎의 지성적 활동으로 삶을 통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한 일에 그들 자신의 삶을 열렬하게 바쳐왔기에, 그렇게 죽기 바로 전까지, 단 한 번뿐인 이 삶을 스스로의 언어로 속이는 일을 지속해왔기에, 그들의 죽음은 비극성을 띠게 된다.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일, 언제나 이것이 가장 비극적인 일인 까닭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개인이다. 우리는 일개의 개인이다. 우리는 단 하나뿐인 몸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단 하나뿐인 존재다.
우리는 보편적 정신의 권속도 아니고, 군집적 구조의 부품도 아니다. 더 좋은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한 지성의 기획에 봉사하는 역군도 아니다.
칼 라너가 말하듯, 우리는 가장 보잘 것 없는 먼지며, 그렇기 때문에 집단적 구조 속에서 그 어떤 유용성을 가진 역할로 기능하는 부품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무용한 먼지다. 우리는 구조를 위해서는 하등 쓸모없는 존재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는 여분의 존재다. 우리는 잉여물이다.
그렇게 우리는 구조 속에 유용하게 딱 들어맞는 필수적인 부품이 아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여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유하다.
우리는 보편적 정신이 아니기에 고유하다. 우리는 마치 공장에서 생산된 100만개의 장난감 중 다르게 찍혀 나온 하나의 불량품과도 같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러하다.
즉, 우리는 고유한 일레귤러(irregular)다.
희소한 것이다. 단 하나뿐인 것이다. 단 한 번뿐인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지금 우리의 몸 자체가 그러하다.
때문에 지금 우리의 몸 자체에 상냥하게 사는 일, 그것이 바로 고유성을 살려 사는 일이다. 자신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로 인해, 일레귤러가 쓰레기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사랑받게 되는 현실이 개방된다. 그리고 그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진짜 낙원이다.
보편적 정신을 주장하는 이들은 고유성의 원초적 근거인 이 몸을 소외시킨다. 소외는 도구화한다는 것이다. 도구화는 또한 대상화다. 이처럼 이 보편적 정신의 기획 속에서, 우리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고작해야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나, 더 발전되어야 할 대상으로 상정된다. 즉, 더 건강해지거나 더 아름다워져야 하는 또 다른 당위의 논리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당위는 언제나 현재의 부정이다. 곧, 지금 드러나있는 기정의 사실에 대한 부정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몸일 수 없이, 즉 지금 우리 자신일 수 없이, 남의 몸이기 위해서, 곧 남이기 위해서, 보편적 정신이 설정한 당위의 논리를 따라 점점 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부정하게끔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삶도 끝내 실종된다.
오늘날 많은 이가 느끼는 공허감과 우울감은, 롤로 메이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이 실종되었기에 느끼는 자기상실감이다. 아무리 보편적인 양식에 따라 잘 살아도, 나로 살지 못하기에 공허하고 우울한 것이다.
나로 산다는 것에 대한 가장 큰 착각은, 관계 속에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집단 및 공동체를 위해 살면, 자연스럽게 나로서 살게 될 것이라는 그 착각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대학을 나온 이가, 그 대학의 발전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해당대학의 평가를 높이면, 그에 따라 나라는 것 또한 긍정적으로 확보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러나 나라고 하는 것은 오직 고유성에만 관련된 것이다. 곧, 삶과 죽음의 문제, 바로 나의 존재의 일회성이라고 하는 것에만 관련된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내가 속한 집단을 위해 봉사한다 하더라도, 그 고유성이 확보되지는 않는다. 아주 쉽게 말해, 집단을 통해 내가 대체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집단 속에서 모든 개인은, 그 개인이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대체된다. 대체재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이 구조의 속성이다. 구조는 애초 대체가능한 것들을 상정해야 존립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집단과 구조의 논리 속에 스스로를 더욱 투신할수록, 개인은 그 자신의 대체불가능성을 더 크게 상실하게만 될 뿐이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대체불가능한 것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듯, 자기 자신과의 관계성뿐이다. 즉, 대상과의 구조적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비구조적 관계성이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자기 몸과의 관계성이다.
붓다는 이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챘다.
자신의 몸이 가장 일회적인 것이고, 가장 희소한 것이며, 그렇게 가장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곧, 지금 이 몸으로 드러나 있는, 지금의 내가 가장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의 나를 소홀히 여기는 이들은, 더 발전되고 진화되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이들은, 전술했듯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이다. 지금 이 내가 죽는 것이 두려우니, 지금 이 내가 마치 별 것 아닌 것처럼 중요성을 두지 않으려는 기만이다.
경우에 따라, 이러한 몸에 대한 소외는 굴절된 종교체험을 통해 강화되기도 한다. 특정한 수행의 방법론을 통해, 마치 자신의 몸이 사라졌는데도 만유하게 정신[영혼]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체험을 하는 이들이 있으며, 이러한 이들에게 정신의 불멸성은 지지되곤 한다.
그러나 이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체험 자체가, 몸이 있기에 할 수 있었던 체험이라는 사실을 굴절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정직하게 살펴보면, 그러한 체험의 끝에 체험자는 반드시 고무줄처럼 그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 또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어떠한 정신도, 몸이 없이는 애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살아 있는 나의 몸이 없으면, 그 어떤 추상적 정신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붓다가 깨달았을 때, 그 살아 있는 몸을 가진 존재 앞에, 모든 천상의 신들이 내려와 엎드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가장 보잘 것 없는 한 몸뚱이일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가장 위대한 정신보다 더 강한 것이다. 니체는 거듭해서 이 존귀한 몸의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해왔다.
바로 이러한 몸이다. 이 정도로 존귀한 몸이다.
바로 이러한 나다. 이 정도로 존귀한 나다.
실존은 이 사실에 대해 다만 정직한 것이다.
실존은, 지금의 이 내가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에 정직함으로써, 지금의 이 나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이다. 가장 대체불가능한 것으로서 지금의 이 나를 가득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의 이 나와 함께, 웃고, 울고, 기뻐하고, 아파하며, 오직 지금의 이 나만이 전부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의 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상냥한 것이다. 곧, 지금의 이 나와의 절대적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끝에 다음과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지금의 이 나로 태어나서 너무나 행복하다. 지금의 이 나라서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다."
이 복음이 선포된다.
절대적으로 대체불가능한 것, 그것은 절대적으로 사랑받는 것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절대적인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한 번뿐이다. 너는 하나뿐인 나의 기쁨이다. 다 있어도, 너만이 유일하게 나의 이야기고, 나의 삶이며, 바로 나다."
실존은 바로 이 자신과의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내가 알리는, 또한 나를 알리는 기쁜 소식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실존의 고유성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