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굴레
내게 주어진 운명은 가혹했다.
천운을 거역한 죄로 나는 그와 연이 닿은 그 순간부터 다시 내가 거역했던 운명을 되돌리는 숙제를 해야 했다.
그것이 나의 천벌.
내가 죽인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해야 했고 그들이 아니면 구할 수 없었다. 내가 살린 수많은 이들의 목숨도 나는 구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하고 내 존재를 알지 못했다. 내 키스로 그들의 기억은 지워졌고 그들의 인생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하찮게 목숨을 던지려 할 때면 내 몸에 한기가 들어 나를 일 순간 그들의 곁으로 옮겨 놓았고 나는 그들에게 하늘의 뜻을 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의 뜻을 거역하려 들기도 하며 그들의 생을 붙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하늘은
더 이상 내 편이 아니었다.
어느 것 하나 어느 누구 하나 나를 기억할 수 없었기에 나는 항상 깊은 고독에 시달렸다.
언제나 일정한 주거지를 가질 수도 없었고 깨어나면 낯선 곳에 널브러져 있거나 미처 구하지 못한 목숨 곁에서 그렇게 애처롭게 속을 끌이며 사라져야 했다.
그래서 내게 밤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는 24시간이 모두 뜬 눈의 하루였고 늘 긴장과 고된 시공을 초월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내 앞에 나를 알아보는 그가 나타난 것이다.
나를 기억해 낸 한 사람.
정우.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편하게 잠들 수 있지만 그에게 다가가려 할수록 내 일상은 더 고달파졌다.
그가 미친 듯 그리웠던 날.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나는 다시는 그를 그리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잘 지낼 줄 알았다. 그를 그리워하고 그를 추억하는 것이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임을 잘 알기에.
그게 내게 주어진 또 다른 천벌임을 알기에.
하지만 그가 소중히 여기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의 목숨마저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나는 그를 차마 놓을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모습을 드러냈고 그 대가는 가옥 했다. 그와 만나고 헤어지고 나면 나는 온몸이 불에 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미처 알지 못하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은 점차 모습을 드러내며 내 능력으로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하며 나는 어느새 내 몸을 통제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손길이 느껴지면 나는 불안에 시달렸다.
내가 불태워 재로 만들어 버린 이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그도 그렇게 될까 봐. 나는 숨죽여 나를 잠재워야 했다. 하지만 그를 만날수록 내 능력은 더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다.
몇 천년이 흘러도 내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인가.
연수는 알 수 없을지 모른다.
내가 기억해 냈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르기를 바라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주어진 운명.
나는 깊은 잠에 빠져 그녀와의 과거로 되돌아 가 있었다.
" 대왕 서두르셔야 합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책사의 목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대열을 정비한 대왕은 한참을 먼 곳을 응시하며 긴 침묵을 유지한 채 천천히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연에
" 내란은 네가 간다고 잠재워지지 않을 터. 책사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인 이상 그는 어떤 다른 대응도 생각했을 것이다. 본국은 내가 직접 선봉으로 이끌어 갈 테니. 너는 가서 그 아이를 데려 오라. "
"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 말하였는데..."
" 때는 내가 정한다.
하늘이 하는 말을 전하는 자. 내가 책사의 목을 베어 버린 이상 하늘도 그 대가를 바랄 터. "
" 이곳에서 잘못 수를 두면 지친 병사들 마저 잃을 수 있다. 이곳까지 안내하고 중재를 해왔던 책사가 없는 현재로서는 마립간도 쉬 길을 내어주지 않을 터이다. 너는 최대한 마립간과 대립이 되지 않도록 멀리 돌아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그 아이를 데려와 내게 받쳐라. "
" 네. 대왕."
" 가자."
대왕이 이끄는 무리가 맹렬히 들판을 가로질러 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을 때 나는 말머리를 돌려 가야산으로 향했다.
멀리서 보이는 사로국 무리들이 미친 듯 말을 몰아 달리는 것을 보며 그 무리에서 그녀를 찾으려 애를 썼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혹여 행렬에 들킬까 멀리 숨겨 두었던 말을 불러 서둘러 가마터로 향했을 때.
가마 터앞에 민들은 입을 닫은 채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들 무리 중 부락 장으로 보이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이가 다가와,
"爱能改变命运
운명은 사랑이 바꾸고
爱会改变时空
사랑은 시공을 바꾼다."
바닥에 이리 적으며 불길로 휩싸여 막 무너져 내려앉는 가장 큰 가마터를 바라봤다.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그 연기. 희고 흩어지지도 않고 곧게 뻗은 것만 같은 그 연기 속.
그 비릿한 피내음과 사람 타는 내음 속.
왜 나는 그 속에서 그녀의 손끝. 스치고 지나갔던 수선화의 향이 느껴졌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미친 듯 울부짖던 나는 그렇게 칼을 들어 그녀를 잃게 만든 나 자신을 원망하며 나 스스로 내 목숨으로 그녀에게 진 빚을 갚으려 그녀의 뒤를 따랐다.
스스로 생을 거둔 자의 굴레. 그 운명은 가혹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데려가고 깊은 어둠에 나를 가두고 내게 희망을 앗아갔다. 목숨도 쉽게 포기하지 못하도록 지독히도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삶의 끝자락에 가서는 살고 싶은 살아야 하는 간절한 마음이 미친 듯 본능적으로 온몸을 휘감게 만드는지.
그 마음이 무엇이기에 나를 처절하게 절규하게 만드는지.
하지만 그런 생각의 끝에 그녀는 내게 항상 홀연 나타났고 어느 순간부터 그 이유가 그녀였음을 나는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녀만이 내 삶을 지탱할 수 있고 내가 살 수 있는 연유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나는 그녀와 함께 해야 하며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전생에서 그러하지 못한 업을 현생에서 그녀의 곁을 미흡하나마 지키고 그녀를 따스히 감싸 안음으로써 나는 비로소 내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인연은 이렇듯 다른 마음으로 만나 하나의 연으로 이어져 운명이라는 굴레 아래 엃히고 설켜 몇 겹의 시간 동안 흘러 엃히고 설킨 서로의 인연을 풀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운명을 그녀가 외면 한채 나를 위해 목숨을 던져 힘든 삶을 살아온 것을 나는 다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와 함께 한 동안 그녀가 보였던 수많은 일들과 말들. 그녀의 그 애절한 타인의 삶에 대한 애정과 희망의 끈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이 운명의 굴레에 힘들게 소용돌이치도록 두지 않으리라.
이 힘든 삶의 굴레에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당신은 내가 지키고 당신을 고통에 몸부림치도록 하는 운명 따위 내가 맞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