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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너를 가졌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소중한

by moonrightsea

` " 축하해. 출산한 거. 못 가봐서 미안해. "

" 고마워. 나도 정신이 없어서 뭐 연락 못해서 미안해. "

세희가 내게 커피를 건네며 말하자 태호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 정영이는 뉴욕에 갔다고?"

" 아 소식 들었나 보네요?"


" 응. 한 부장이 이야기하길래. "

" 둘째 이름은 뭐예요?"

" 태주야. "

" 이름 이쁘네요. 아들이죠?"

" 응."


" 언니 부럽네. 아들 잘 키워서 벌써 미국에 보내고. 비결 좀 알려줘요. 어떻게 키운 거야?"

" 뭐 정영이는... 부모가 이런 말 하면 팔불출이라... 어려서 별일을 다 겪고 컸으니 철이 빨리 든거지. "


그렇게 말하며 나는 태호를 바라봤다.

그러자 태호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더니 일어났다. 그리고 한참을 뜸을 들였다.




" 이렇게 두 사람이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겠죠?"

" 사실은 말이야. 언니. 태영이 언니를 만나고 싶어 해. 언니한테 가고 싶어 해서."


그 말을 듣고 나는 일어나 태호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이건 약속과 틀린데요? 안 그래요?"


" 그건 태영이가 결정한 거라. 나도 반대중이야. "

" 하지만 언니. 태영이 뜻이 완고해. 언니 곁에 있고 싶다고 해서..."


나는 불같이 화가 났다. 세희를 노려 보며,

" 세희야. 그새 마음이 바뀐 거야? 태영이는 누구보다 너를 믿고 의지했을 아이야. 그 아이가 그렇게 한순간에 마음이 달라질 리 없잖아? 후계 구도라도 바뀐 거야?"


그러자 태호가 말했다.

" 그럴 일은 절대 없어. 누가 뭐래도."


그러자 세희가 조금 난처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동생이 태어나니 태영이 조금 힘들어했어. "

" 그래봐야 이제 10살이야. 이미 외국인학교에 다니고 있잖아. 충분히 이야기 통할 나이고."


" 당신이 좀 와 있어 주면 안 될까?"

" 그건 말이 안 되죠. 여보."

순간 당황한 세희가 말했다.




" 아니 내 말은 태영이 곁에 말이야. 우리랑 따로 지내며."


나는 완고하게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 미안한데 잊었나 보네. 이건 두 사람의 가정문제야."

"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내가 태영이를 돌보던 동안 내가 해줄 수 있는 만큼 충분히 해줬다고 생각해. 지금 무엇보다 태영이에게 필요한 건 세희의 손길이고 엄마의 손길이에요. 세희는 그럴 자격과 의무가 충분한 사람이고. 그렇게 해야 하고. 난 그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우리 가족을 희생시키고 내 인생을 희생하면서 치렀다고 생각해. 더는 나를 기만하려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


내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자 그런 내 팔을 태호가 잡았다.


그런 태호를 바라보자,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고 그의 눈빛. 나는 예전에도 본 기억이 났다.


그의 어머니 기일에. 하지만 나는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 태호 씨. 태호 씨 답지 않아. 더는 이렇게 흔들리지 말아요. 당신에게 이런 모습 어울리지 않아. 당신의 가정이 바로 코앞에 있잖아요. 세희도 당신의 아이들도 당신이 지켜야죠. 당신이 흔들리는 모습은 나 혼자 본 것으로 충분하니까. 더는 이렇게 약한 모습 가족들에게 보이지 말아요. 당신을 위해서도. "


" 연수야..."


" 언니..."

" 세희야. 나는 오늘 두 사람 얼굴 본 것으로 충분히 즐겁고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할게. 우리 이렇게 오늘까지 딱 셋이 이렇게 본 거 세 번째니까 이 이상은 더 만나지 말자. 다음에 보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꼭 기억해. 다음에 나를 보는 일이 없도록. "


나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 호텔방을 빠져나왔다.




호텔 로비로 나오자 비가 쏟아졌다. 스산한 겨울비.

호텔 앞에 늘어선 차들을 뒤로 한참을 걸어 내려오며 나는 빗속에 눈물을 쏟아냈다.


머릿속에 온통 가득 찬 태영이. 이렇게 보낼 아이가 아닌데. 우리 태영이. 제발 나의 이 모진 발걸음으로부터 부디 저들에게 그 아이에 대한 애정이 되돌아오길 바라며.


뒤늦게 정우에게 전화를 걸어 차에 올랐을 때 정우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가 이내 아무 말도 묻지 않고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참을 차를 몰아 어디론가 달려갔다.


나는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그렇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이윽고 길게 이어지던 산길이 끝나나 싶더니 보이는 바닷가 부두.


어느새 하늘은 어둑해져서 시커먼 바닷물이 하늘인지 바다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시원하게 비가 쏟아져 붙고 있었고 그렇게 차에 헤드라이트를 켜고는 한참을 서 있었다. 바다를 바라본 채.


" 주말인데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까?"


정우는 내 눈물을 닦으며 말했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이내 다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얼마 뒤 도착한 바닷가 배 모양의 호텔.


큰 배가 마치 절벽에 걸린 것 마냥 두둥실 떠 있는 것만 같은 호텔은 꽤나 크고 웅장한 크기를 자랑했다. 리모델링을 끝내서 인지 내부도 깔끔하고 바다 전망이 예쁜 스위트룸에 방을 잡은 우리는 타올로 젖은 머리를 말리며 창가로 향했다.

그가 내 뒤로 다가와 말없이 나를 끌어안았고 유리창문에 그런 우리의 모습이 비쳤다.




" 당신 무슨 가슴 아픈 일이 있었던 거야?"


" 낮에 태호 씨랑 세희 만났어. "


정우는 나를 돌려 바라봤고 다시 나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아무 말 없이.

" 둘은 잘 지내지?"


" 응. 그런데 태영이 나한테 오려고 한다더라고. 그래서 안된다고 했어. "


나는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눈물을 쏟았다.


말을 이을 수 없는 그 순간.


어떤 말로도 설명을 못하는 이 미어지는 가슴.

그간 그렇게 그리움을 잊어가며 잘 지내는 줄만 알았던 태영의 소식을 이렇게 듣고 나니 너무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이 오죽했으면 이곳까지 나를 찾아왔을까란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그들이 너무 야속하고 또 한편으로는 태영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이 또한 견뎌야 하는 법.

태영을 살리려면 방법이 없었다. 그게 더 나를 미치게 한다는 것이 더 속이 상할 따름이었다.




" 태영이는 태어날 때 5살 이후로 생이 그려지지가 않았어. 그러다 알게 되었지. 어느 날 보니 하우스 키퍼랑 있는데 태영이 환하게 웃으며 너무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는데 그 아이 명줄이 길어지는 게 보이잖아. 그래서 나랑 거리를 두니까 조금씩 그 아이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명이 길어지더라고. 내 천운을 그 아이에게 조금씩 옮기면서 나는 그 아이를 살리려면 그 아이 곁을 떠나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게 그 아이를 살리는 길인걸."


" 그 아이는 여느 아이처럼 평범한 사랑을 받아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정영이는 타고난 명이 남달라서 내가 손을 델 수도 없을 만큼 그 기가 셌는데 태영이는 기가 셌는데도 오히려 정영이보다 더 영특한데도 명은 달라서 그게 늘 불안했거든. 그런데 걱정한 것처럼 이번에 한 고비를 넘기고 갔네. 그런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아플까. 여보"


그러자 정우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 차라리 내가 이런 게 안 보이고 몰랐다면 그냥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품에서 냉큼 태영이를 데려와서 사랑이라도 듬뿍 주고 온몸으로 가득 안아줄 텐데... 차마 내 자식이라... 그러지를 못하겠어. 그러면 안 되는 걸 아니까 더 못하겠어. 그게 그 아이에게 더 힘든 일인 걸 아니까. "


정우는 내 얼굴을 살며시 들며 말했다.


" 당신이 그렇게 보고 싶으면 그냥 멀리서 몰래 보고 올래?"

" 그건 안돼. 그 아이도 내가 근처에 가면 알아. 정영이처럼. "


" 그럼 태영이도 느껴? 당신 존재를?"

" 응. 둘 다 내가 멀리 있어도 느껴. 가끔 꿈에서 나타나기도 하거든. 그 아이들이 정말 내가 그리우면 찾아오기도 해. "

" 그래서 정영이 당신이 어딨는지 알고 마음도 이해하기도 하고 찾아냈구나. "


" 그렇지. 내 새끼들이니까. 특히 태영이는 타고난 능력이 좀 남달라서 비상한 머리를 지녔거든.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해. 정영이는 어려서부터 당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마음이 안정적이지만 태영이는 달라. 감정을 통제받고 자라서 지금은 태영이의 온전한 사랑은 하우스키퍼 밖에 없어. 내 마음이 전달이 되어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칫 내가 조금이라도 선을 넘으면 태영이 금방 알아차려서 흐름이 깨져버려서 안돼. "




인간이 되며 내가 받은 업보.


가슴으로 낳아 마음에 담아 키우고 그 마음을 나눠주고 내 피와 살을 나눠 만든 내 새끼들.


하나는 생을 살리는 운을 타고난 아이.


하나는 내 손으로 명을 거둬야 하는 아이.


하지만 나는 결국 그 명을 거두는 업을 등을 져서 이렇게 내 자식을 품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 벌이라도 평생 짊어지고 살더라도 나는 그 명을 지키지 않기 위해 모진 어미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그 아이의 생에 부모는 내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에게 그 아이의 명이 가 있으니 적어도 내게 오지 않는 이상은 그들이 지켜 내리라.


삶은 야속하다고 말하지만 삶은 살아가며 이뤄가고 생각한 대로 만들어지는 법.


그 아이들이 꿈꾸는 세상대로 세상은 만들어질 것이기에 나는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지금보다는 내가 살아가는 생보다는 아름답기를 바랐다. 그렇게 될 테니까.


애가 타던 내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던 태영이 그날 꿈에 나타났다. 나는 그런 태영이를 다정히 품에 끌어안았다.

" 우리 태영이 잘 지내지?"




태영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품에 안겨 있었고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태영의 얼굴을 들어 바라봤다. 태영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 많이 그리웠구나. 내 새끼. 보고 싶었구나. 찾아오지 그랬니..."

" 엄마가 곁에 있는 걸 알면서도 다가가면 안 되는 줄 아니까. 엄마가 또 멀리 사라질까 봐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엄마. 제 곁에 있으면 안돼요?"


태영의 애틋한 목소리.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나는 몸을 일으켜 일어났다. 그리고 태영에게로 갔다.


태영이는 곤히 잠이 들어 있었고 그의 곁에는 하우스 키퍼가 잠들어 있었다. 많이 힘들어했나 보다.

나는 그런 태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기까지. 이 아이를 그리워하고 곁에 두려 할수록 아이를 더 힘들게 하는 것.


내 눈물이 아이의 볼에 흐르자 하우스 키퍼는 몸을 움직였고 나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다시 태영을 마주했다.


" 태영아. 엄마는 항상 태영이 마음속에 있단다. 우리 태영이 항상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걸 엄마도 알고 있으니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아버지 어머니 말씀도 잘 듣고 잘 지내야 해. 동생도 많이 이뻐해 주고. 동생에게 형은 우리 태영이 뿐이잖아. 동생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내도록 형만 찾을 텐데. 그러려면 더 씩씩해져야겠네? 우리 형이 얼마나 멋진지 알려줘야지? 잘할 수 있지 태영이?"


" 엄마... "

태영이는 그렇게 다시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언제나 내가 떠나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아이. 그래서 더 간절히 그 마음을 이렇게 온몸으로 표현하는 아이.


" 엄마는 태영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게 엄마의 행복이야. 태영이가 하고 싶은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되고 누구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될 걸 아니까. 항상 밝고 웃으며 잘 자랄 거야. "


마법 같은 내 말은 태영의 얼굴을 미소 짓게 만든다. 그런 태영의 얼굴은 마법처럼 내 얼굴도 미소 짓게 만든다. 내 손끝에 닿은 태영의 손끝. 그 손끝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


눈을 뜨자 창밖으로 바다 너머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잠에서 깬 정우는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봤다. 내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 당신 머리가 다시..."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누웠던 배게를 바라봤다. 배게는 어느새 내 검은 머리가 수북하게 빠져 있었고 내 머리에는 하얗게 흰머리가 뒤덮여 있었다. 그 아이를 만나면 안되는 운명.


하늘은 분명 내게 이토록 경고를 하는데...


그러면서도 나를 그아이에게 이끄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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