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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소소한 일상

자연스럽다는 것은

by moonrightsea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집에서 뒹굴거렸다. 그리고 햇살이 유독 따스한 하루.

나는 종합 콘텐츠 회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기획 관련 업무를 맡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 이 정도 스펙이면 서울에 계셨으면 제법 높은 연봉을 받으셨을 텐데 저희는 그만큼 대우는 못 해 드려요."

" 괜찮아요. 회사 내규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일은 자신 있습니다. "


" 직책은 과장이지만 아시다시피 규모가 작아서 디자인부터 일일이 다 관여하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 관련되는 자격증은 보셔서 아시겠지만 어느 정도 편집까지는 아니라도 보고 분석하는 일은 잘하니 실무진만 잘 붙여주시면 문제없을 겁니다. "


" 그럼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 저희도 때마침 이곳에 큰 일거리들이 종종 들어와서요. "

"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


그렇게 직장을 잡고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한 달이 훌쩍 시간이 지났고 어느새 하루하루는 익숙하게 흘러갔다. 퇴근을 한 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마무리하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변기에 앉아 칫솔을 입에 물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더니 정우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는

" 아 냄새~~"

그러더니 내 볼에 입맞춤을 했다.


" 뭐 하는 짓이에요. 정영이도 있는데."

" 뭐 어때? 아빠가 그만큼 엄마를 좋아하나 보다 생각하겠지."

" 냄새나요. 문 닫아요. "

정우의 머리를 밀어내고 문을 닫자 문득 나는 웃음이 났다.

이런 상황이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부끄럽지 않은 내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의 익숙한 모든 행동들은 너무나 내게는 당연한 것들이고 그의 애정 어린 행동들은 내 생활 곳곳에서 느껴졌다.


TV를 본다고 거실에 누워 있으면 냉장고 문을 열고 열심히 들여다보다 나를 발견하고는 이내 쪼르르 달려와 내 가슴을 한번 쓰윽 만지고 다시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입에 물고는 내 곁에 와 앉아서 다시 아무렇지 않게 TV를 봤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약간의 불만이 섞인 표정의 정영이 나와서는 TV소리를 줄이며 우리를 째려보고 들어갔다.


사춘기 아들을 둔 부모들 치고는 너무 여유롭고 둘만 알콩 달콩인 눈치 없는 부부.

그래도 둘은 눈을 마주치며 크큭 거리고 정영이 방에 들어가자마자 둘이 기다렸다는 듯 볼륨을 높이고는 이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를 안은 정우가

" 우리 이사 가야겠다. 아무래도 사춘기인 정영이 방이 너무 작아."

" 정영이 핑계는... 방이 너무 가까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이내 살며시 나를 침대에 눕히며 조용히 속삭였다.

" 물론 그게 제일 큰 문제기도 하지. 공부에 방해되잖아. 우리가 크큭."


그리고 정우가 내게 키스를 하려고 들 때

" 똑똑"

정영이었다.


" 음. 두 분이 정말 사랑하시는 건 이해하겠는데요. 생각보다 조금 많이 방해돼요. 데이트는 나가서 해주세요. 네? "

나는 얼른 침대에 엎드려 자는 척을 하고 벌떡 일어나 옷을 입은 정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 으응. 어 엄마는 잠들었어. 나도 곧 잘 거야. 미안해. "


그러자 정영이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 갔다. 까치발을 들고 내게 다가온 정우가

" 와 예민한 자식. 저런 놈인 줄 정말 몰랐네. 질투는."


" 애 키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요? 어서 자요. "

" 히잉~~ 그래도."

그러며 정우가 내 몸을 칭칭 감아돌았지만 나는 이내 그런 정우의 팔을 들어 정우 몸에 붙인 채 눈을 감겼다. 그리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 자장자장. 대신에 내일은 퇴근하고 밖에서 봐요. "

" 정말?"




회사에 반차를 내고 나온 나는 급히 은행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일하며 모았던 돈 8천만 원. 학자금 대출에 전세자금 대출은 퇴직금을 정산하면서 다 갚았었고 그 돈을 갚으러 은행에 갔을 때 나는 그 은행이 태호의 주거래 은행이란 사실을 VIP실에 안내 받고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살았던 원룸도 내가 인터넷이며 금융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통장 거래만 하고 집도 발품을 팔아가며 직접 구하는 것을 알았던 그의 비서가 인근 부동산은 다 돌아서 미리 선금으로 월세까지 다 흥정을 마쳐서 주변시세를 나는 전혀 몰랐다는 것을 출산을 하고 집을 나오고서야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나는 받은 게 없었다.


그가 내게 주었던 명품이며 국내 한정판들은 그의 집에 고스란히 다 두고 나왔고 그가 내게 선물했던 그 아름다웠던 보석이며 목걸이, 반지 들은 모두 화장대 위에 보석함 속에 고스란히 두고 몇몇은 모두 하우스 키퍼에게 선물했다.


오로지 그가 볼 때만 기념일에 주었던 것들을 겨우 하는 정도였다. 그것마저도 세희에게 주고 나왔다.

돈이란 것은 이름표 마냥 내 손으로 번 것이 아니면 그만큼의 대가가 따른 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 돈도 그 물건들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내 피와 땀으로 구해서 얻은 것이 아닌 것들을 탐을 낼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미련 따위 욕심 따위도 들지 않았다. 예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해야 할 이유를 몰랐다.

그러니 더 내 것은 아닐 수밖에.




내가 번 돈, 내가 모은 돈.

그 돈은 오로지 내가 식비를 아끼고 열심히 일해서 벌어 온 내 월급이었다. 내 6년 치 월급. 서울에서 생활하며 대학원까지 다닌 것 치고는 제법 선방을 해서 모은 돈이었다. 그래서 더 가치 있게 쓰고 싶었다. 이 돈이면 내가 잘 수 있는 내 방 하나는 구할 수 있는 돈.


나는 그 돈을 통장에 다시 고스란히 입금을 하고는 서둘러 정우를 만나러 고깃집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이미 정우가 들어와 정영과 앉아서 이야기를 하면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나는 옆에 가서 살며시 앉아 고기를 한두 점 집어 쌈을 싸서는 정영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 어 당신 변했어. 왜 나 먼저 안 주고 정영이 먼저 줘?"

" 정영이는 이것 먹고 앞으로 학원 가야 하니까요?"


" 정영이가 학원에? 왜?"

" 엄마 저 학원 안 다니는데요?"


정영과 정우 둘 다 눈이 동그래져서는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한번 생긋 웃고는

" 응. 이제 다녀야 해. 엄마가 돈을 벌고 이제 집에서 있으니까. 너는 학원 가서 네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네게 필요한 것을 더 배우면 돼. "


" 저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어요. "

" 공부는 혼자 할 수 있지만 살아가는 건 혼자 살아갈 수 없어. 그래서 너도 사람들과 어울리고 살아가는 걸 배워야 해. 그러니 학원 다녀. "




그러며 나는 테이블 위에 통장 3개를 꺼내어 2개는 정영에게 1개는 정우에게 주었다.


" 자 이건 정영이 거. 여기 1개는 네가 고등학교 3학년까지 쓸 네 교육비야. 이건 네 교육비의 종잣돈이니 앞으로 네가 잘 굴려서 불려야 해. 난 더 이상 네게 돈을 지출하지 않을 계획이야. 그러니 네가 잘 머리 굴려서 어떻게 그 돈을 굴릴지 계획을 세워서 나에게 보여줘. 그리고 나머지 1개는 네가 대학에 들어가면 쓸 거야. 비행기 값. 네가 가고자 하는 미국으로 갈 비행기값. 그 통장의 돈을 쓰고 싶으면 1개를 잘 굴려야겠지?"


그리고 하나를 정우에게 보여주며,

" 이건 당신이 받을 거예요. 내 방값. 이제까지 당신에게 아무것도 준 것 없이 받기만 했으니 이 돈을 보태서 이사 가요. 나머지는 열심히 벌어서 같이 갚으면 되니까. 대출받고. 그럼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겠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둘은 갑자기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둘이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참 이야기를 하고 들어와서는

" 저 여보. 이건 아닌 거 같은데?"

" 엄마. 좀 너무 하신 거 같은데요?"


" 아냐. 하나도 너무 하지 않아. 둘 다 충분히 할 수 있어. 파이팅!"


내 말이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아니면 둘 다 대책이 없다 당해서 당황한 것인지 어이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 당신 때문에 경제 공부하게 생겼네. 본의 아니게 목표를 세워야겠어. "


" 저도요. 제 목표는 오로지 공부였는데... 어머니 때문에 뭔가 다른 걸 더 공부해야 할 거 같아요. "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씩 한번 웃고는 나는 말했다.


" 자 고기 탑니다. 어서 드시죠? 최후의 만찬!"


하지만 그런 나의 계획과 달리 정영은 학원을 가지 않았다.




대신 주식을 공부하고 수익을 내며 모의 주식투자대회에서 상을 타고 다시 상금을 모으고 종잣돈을 모으더니 급기야 고등학생 입학 무렵이 되자 미국의 주립 고등학교에 원서를 썼다.


그리고는 고배를 마시고 다시 한해를 쉬고 다시 원서를 쓰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사이 정영이 투자한 주식이 크게 올라 정영은 그 돈을 밑천으로 기숙사에 들어가며 우리의 손을 완전히 벗어났다. 내가 버는 돈의 절반은 그렇게 정영의 생활비로 미국으로 보내고 절반은 이사한 집의 이자로 나갔다.

새로 옮긴 집은 방이 하나 더 있는 29평대 아파트. 비록 새아파트는 아니었지만 나름 예전 아파트보다는 나았다. 엘리베이터도 있고 무엇보다 호수가 가까워서 좋았다.


퇴근을 하면 정우는 나를 데리러 와서 나를 태우고 같이 집으로 향했고 저녁을 먹고 나면 호수를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내가 야근이 잦은 편이라 가끔 정우가 늦게까지 기다려 나를 데려가는 날도 많이 있었다. 그때마다 정우는


" 누가 너 납치해 갈까봐 너무 걱정돼."


그렇게 말하며 차에 타는 내게 다정히 볼을 쓰다듬고는 입맞춤을 했고 그렇게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방긋 웃으며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그가 주는 편안함. 다정함. 내게 온 충만한 행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래도 정영의 빈자리는 ... 크게만 느껴졌다.

4년의 시간은 그렇게 너무 순식간에 흘렀다.




나름 우리와 그렇게 자주 부딪힐 일이 없고 워낙 조용한 아이였지만 정영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징검다리 같은 존재.

있는 듯 없는 하던 아이지만 곁에 다가와 포근히 안아주기도 하고 가끔은 내게 다가와 도란도란 일상을 이야기 하며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해가 안되는 문제를 내게 가져와 머리 아프게 설명을 몇번을 반복하며 나를 이해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빨레를 개면 곁에서 말없이 빨래를 가져다 옷방에 가져다 놓고 밥을 차리면 나와서 수저를 놓고 설거지를 하면 와서 뒤에서 말없이 안아주던 아이. 속이 깊은 그 아이가 남겨둔 자리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런 정영이 너무 그리웠고 매주 주말이면 우리는 인터넷으로 화상 통화를 했다.


그때마다 정영은 환하게 웃으며 새로 사귄 미국 친구들을 보여줬다. 워낙 조용한 녀석이라 친구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외국에서는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고 잘 지내고 있었다.


어쩌면 정영에게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것이 우리가 아니라 정영 스스로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그 아이가 일깨워주는 것이 아닌가.


정우는 어느새 소방서에서도 자리를 잡아 현장에 출동하는 날 보다는 사무실에 근무하는 날이 더 많았다. 나도 일이 손에 익어 어느새 회사에서 자리를 잡았고 강릉에서 생각보다 국제적인 행사나 대기업 관련 일들이 많이 진행되면서 서울에서도 종종 사람들이 내려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과거에 거래했던 업체 관계자들도 간혹 얼굴을 보게 되었다.


" 차장님 여기 계셨어요?"

" 아 저 원래 강원도 살았어요. "




그날도 우연히 서울에서 거래하던 업체 관계자가 내려와 때마침 서로 구면이라 인사를 건넸다.


" 아 저는 애기 놓고 안보이셔서 그만 두신 줄 알았지 뭡니까? 항간에 회장님.. 앗."

같이 내려온 옆의 거래처 직원들이 눈치를 주며 말을 끊어서 거래처 관계자도 입을 닫자 같이 근무하던 여 과장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 서울에서 잘 나갔나 보네요?"

" 뭐. 제가 좀 실력이 뛰어났죠. "


나는 머슥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아... 뭐 아무튼 하던 이야기 마저 하시죠. "


" 원래라면 서울에서 저희가 기획까지 다 해서 발주만 여기서 하는데 워낙 이쪽으로 정평이 나 있으시고 또 이 곳을 잘 홍보하신다고 소문이 나서 이번에는 저희도 믿고 맡겨 보려고요. 이 지역을 알리는 홍보 행사기도 하고 또 국제적인 기업가들이 방문하는 행사기도 해서 도에서도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거든요. "


" 그간 저희 회사가 가진 지역 홍보 자료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인다니 저희로써는 영광이죠. 이 곳을 방문하고 다녀가시는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


강원도 관광 방문의 해를 맞아 여러 기업인들을 초청하는 자리에 도에서 나온 관계자와 서울에서 내려온 광고회사 관계자, 그리고 우리 업체 관계자와 사장까지 함께한 자리에 호텔에서 마련해준 회의실에서 브리핑을 마치고 일어나 로비로 나오는 데 낯이 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문에 길게 늘어선 차들 사이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의 경호를 받으며 로비로 들어선 그는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반갑게 내게 인사를 건넸다.


" 오랜만이네. 반가워. 잘 지냈어?"




순간 당황한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의 스스럼 없는 행동과 말투. 그에 비해 그를 수행하는 이들의 그 깍듯한 태도. 내 주변에 있던 그들은 이내 웅성 거리다 너나없이 달려 나가 손을 내밀며,


" 회장님. 안녕하세요. 여기는 웬일이십니까?"

"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강원도에서 나온..."


그런 그들을 가뿐히 지나쳐 내게 다가온 그는 눈을 마주친 채 손을 내밀며,


" 인사는 받아주는 거지?"


" 안녕하세요. 김태호 회장님. 잘 지내셨어요?"


그러자 그가 머쓱한 듯 머리를 쓸어내리며,

" 후훗. 나는 잘 지냈지. "


" 언니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보니 반갑네. 같이 차 한잔해요. "


그의 뒤에서 세희가 내게 다가와 내 어깨를 감싸며 안으며 말했다.


그제야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쭈볏쭈볏 자리를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을 보며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세희를 돌아봤다.


" 잘 지냈어? "

" 네. 언니 올라가요. 가서 차 한잔 해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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